구례의 북동쪽으로는 지리산이 봉우리마다 기품 있는 체감으로 자락을 펼치며 들녘으로 나리고, 고준한 연봉의 능선은 바다의 파도처럼 첩첩 흐르는데, 남서쪽으로는 또 무등산의 줄기를 타고온 봉긋한 산봉우리들이 두둥 떠 있다. 구례의 곡창지대는 지리산과 남서쪽 연봉이 빙둘러 비호하고 있는 판인데, 이 곡창지대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서시천이 낮게 흐른다.
남원, 곡성을 거쳐 남으로 흐르던 섬진강은 구례 남서쪽 연봉의 배후를 치고 동남향으로 흐르다가 연봉이 끝날 즈음 연봉의 흐름을 뚝 끊고 힘차게 북으로 역류하고, 구례읍에서부터 다시 동으로 틀어져 순류한다. 서시천은 섬진강이 동으로 꺾는 찰나에 절묘하게 합수하고, 잠시 끊어졌던 남서쪽 연봉의 흐름은 자래봉, 오산, 오봉산 등으로 비로소 마무리된다. 동시에 운조루의 토지면과 간전면을 지나면서 천하명당의 평야지대가 마감되는데, 이제 섬진강은 지리산 자락과 백운산 자락에 시퍼런 경계선을 그으며 양 산자락에 협착하여 흐른다. 섬진강이 동으로 동으로 협곡 팔십리를 가는 동안 지리산 자락과 백운산 자락은 흐르는 강물 위에 제 얼굴을 비추어 각기 대안對岸의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화개나루에 이르러 지리산과 섬진강은 결별의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지리산 고봉들의 능선은 오른쪽으로 용틀임하고 섬진강은 협착한 계곡을 빠져나오면서 남쪽을 향하여 일망무제의 울음을 터뜨린다.
우뚝 선 지리산과 고요한 섬진강은 협곡에서 준엄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다가 화개나루에 이르러 이완의 결별을 하게 되니, 지리산 형제봉은 이어받은 연봉의 흐름을 멈추지 않고 천왕봉을 향하여 동으로 용틀임하고, 섬진강은 유연하게 남으로 곡절한다.
마침내 섬진강 강줄기는 지리산의 고준한 능선과 더는 병행하지 못하고 어긋나면서 제 품을 갖기 시작하는데, 이 품에서 넓은 모래톱이 모습을 드러내고 양안의 풍경이 강물에 복속하기 시작한다. 하동포구 팔십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옛 화개 나루에 들어선 남도대교 위에서 이 유구한 결별의 수순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섬진강이 피어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협곡 팔십리를 빠져나오면서 일망무제의 울음을 터뜨리는 듯하다.
구례읍에서 화개나루까지는 대략 20 킬로미터 못 미치고, 다시 화개나루에서 쌍계사까지는 6킬로미터에 이르니까, 걸어서 가자면 일여덟 시간은 잡아야 넉넉하다. 차로 달리면 20분, 자전거로 가자면 두 시간 정도 걸리려나. 많은 이들이 전국 최고의 국도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 19번 국도는 지리산 자락을 따라 흐르고, 백운산 자락으로는 861번 지방도로가 흐른다. 작가 김훈은 19번 국도를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숲과 강의 가을빛을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그 뒤 자전거를 굴려 861번 지방도로를 지나가면서 봄날의 지리산 숲을 또 이야기하고, 화개 나루에서 배를 타고 19번 국도쪽으로 건너가 하동의 차밭에 들러 차를 음미하였다. 김훈이 자전거와 차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갔다면, 매천 황현은 서시천에서부터 하동 포구까지 섬진강의 흐름을 따라 걸었다. 매천은 서시천에서 하동포구까지 적어도 두 번에 걸쳐 흘러갔다가 귀환하였다. 이 어지러운 편력 속에서 그는 시를 남겼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마도 아무도 모를 사람인데, 수연 스님이 쌍계사에서 구례읍까지, 구례읍에서 쌍계사까지 걸어서 오간 적이 있다. 그것도 하루 나절에. 그 스님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내가 원시적인 육체로 마주하였던 강줄기는 바로 이들이 지나간 흔적이기도 하였다.
매천 황현은 눈부신 강길을 걸었다. 그가 살던 곳이 구례군 광의면이었으니까, 서시천에서부터 하동포구까지 걷자면 넉넉잡아 사흘이 걸린다. 아마도 그는 섬진강 대안으로 건널 경우 이외에는 배를 타지 않았던 듯하다. 매천은 서울로 상경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전해인 23세(1877)에 섬진강을 따라 걸었고, 적어도 연곡사를 들렀다. 29세 때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이듬해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구례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첫 섬진강 답파 이후 10년이 지난 33세(1887)에 다시 섬진강을 따라 흘렀다. 이때 적어도 쌍계사, 평사리를 방문하였다. 이듬해 부모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하였으나 또 벼슬을 포기하고 구례에서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906년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단식 순국하여 주검으로 부산항에 돌아왔을 때 달려가 조문하였으므로, 아마 이때도 섬진강의 물줄기를 의지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이것까지 포함하면 매천은 섬진강을 최소한 세 번에 걸쳐 따라 흘렀다. 매천 황현을 기리는 것으로는 매천사 이외에 또 하나로 용호정이 있는데, 그것이 서시천과 섬진강이 합수하는 지점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매천의 섬진강 답파는 그의 생애에서 간과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절이 낡아 불당에는 그림 한 폭 없는데
오직 탑 하나만이 구름에 기대어 있구나— 연곡사, 1877년
붉은 잎과 푸른 이끼 온통 세상과 다르고
— 쌍계사 국사암, 1887
십년 전에도 흔적을 벌여놓았는데
무슨 일로 이곳을 다시 지나가느냐— 섬진강은 동으로 흘러 하동으로, 1887
고국에 산이 있으되 빈 그림자만 푸르르니
가련하구나, 뼈를 묻을 곳 어디 있느뇨— 면암 최익현 선생을 곡하다·3, 1906
연곡사 해우소에 비친 그림자. 구름에 걸린 탑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볼 줄 알았던 매천은 이런 자신의 그림자도 보았으리. 그의 눈에 비친 사람은, “빈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매천은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으므로, 그의 글에서 서사적인 굵은 선만을 기대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대단히 서정적이고 순간적으로 드라마틱하다. 그는 전쟁의 참화로 한 폭의 그림도 없었던 연곡사에서 구름에 기댄 삼층석탑을 기어이 한 폭의 그림으로 보았으며, 국사암 입구의 천년 묵은 느릅나무 잎의 붉음과 기왓장 이끼의 녹음이 얼마나 통렬한 대비인가를 감지할 줄 알았다. 풍경에 대한 이런 예민하고 강렬한 감응은 그러나 허무함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흔적 위에 흔적을 겹치며 섬진강을 무목적적으로 유랑하는 그의 반복적인 생애는 고국의 산천을 빈 그림자의 적거지로 만들어버렀다. 어찌 그 빈 그림자의 적거지에 강직한 최익현의 뼈가 송곳처럼 내리꽂힐 수 있겠는가. 매천은 이미지의 충돌을 보았고, 최익현의 뼈를 묻을 곳을 찾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서정적인 감응이 빼어났으나 그의 삶은 자결을 함으로써 결국 대서사를 이루었다. 서정적인 인간이 오히려 서사적일 수 있다는 이 분명한 사례는,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죽음에 이른 인물들에게서 되풀이되었다. 그들은 논리에 맹목적이었다기보다는 그 논리의 일면에 묻어 있는 그 뭔가에 전율하듯 격앙되이 반응했던 이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무리의 최선두에 섰던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조용하고 순한 이들, 어찌 보면 뒤안길에 처진 이들이었다. 나는 논리와 이념에 투철한 이들이 무섭지 않다. 엄청난 간격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이들, 서정성의 깊이에 도달한 이들이 두렵고 무섭다.
種花莫種桃 恐有花浮水
꽃을 심되 복사꽃은 심지 말게나
그 꽃이 물에 떠갈까 시름하노라
서정성의 깊이, 또 하나의 무릉도원이 자신 안에 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나 마침내 그의 생은 복사꽃처럼 물결 위로 지고 말았다. 그 부수浮水하는 한 점 연분홍 꽃잎을 보고 시퍼런 서사 속에 숨어 있는 서정을 예견할 수 있는 자는 섬진강변을 걸으며 매천을 회상할 자격이 있다.
김훈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허무의 냄새를 강하게 맡았다. 허무성에 함락되지 않으려고 저렇게 사물에 영웅적으로 치중하고 또 문체가 아름다운 것인가.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읽는 순간만큼은 엄청난 자력으로 끌어당긴다. 그는 사물의 단순한 움직임을 거대한 서사구조로 재편하기를 좋아하지만, 흔히 인간들이 말하는 서사는 허위요 거짓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탈정치성이 나오고, 인간에게 좀더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것, 즉 먹는 문제라든가 육체성 앞에 솔직하게 서고자 한다. 그가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을 따라가면서 쓴 글들은, 내가 섬진강을 따라 걸으면서 보았던 어느 한 풍경을 경전을 대하듯 음미하여 거대한 서사적 해석을 하는가 하면, 인간의 육체성에 정직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을 도끼로 장작을 패듯 패낸다:
가을빛 속을 흐르는 물은 헐거워진 산의 그림자를 거꾸로 비친다. 물은 선정禪定하듯 바닥으로 잦아들며 고요하다.
그 물 위에는 거꾸로 선 산 속의 나무 한 그루까지도 비친다. 물은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물은 그 위에 싣고 있던 산 그림자를 잇닿는 물에게 넘겨주는데, 그 흘러감과 잇닿음에는 구획과 간격이 없는 것이어서, 흐르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위에 비치는 산 그림자는 흘러서 사라지지 않는다.
— <가을의 빛>, «풍경과 상처»에서
자작나무숲은 생명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늘 흔들린다. 자작나무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잘 웃는 젊은 여자와도 같다. 자작나무 잎들은 겨울이 거의 다 가까이 왔을 때 땅에 떨어지는데, 그 잎들은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그 이파리들은 이파리 하나하나가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바람을 감지하는 모양이다. 그 이파리들은 사람이 느끼는 바람의 방향과는 무관하게 저마다 개별적으로 흔들리는 것이어서, 숲의 빛은 바다의 물비늘처럼 명멸한다. 사람이 바람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도 그 잎들은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은 멀리서 보면 빛들이 모여사는 숲처럼 보인다. 잎을 다 떨군 겨울에 자작나무숲은 흰 기둥만으로 빛난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의 기쁨과 평화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들일 만하다.
— <다시 숲에 관하여>, «자전거 여행»에서
차는 살아 있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실존의 국물인 동시에 살 속으로 스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찻잔 속의 자유는 오직 개인의 내면에만 살아 있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요한 소승의 자유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계통을 부여하려는 논리의 허세가 없다. 차는 책과 다르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과장하거나 증폭시키려는 마음의 충동이 없다. 차는 술과도 다르다. 책은 술과 벗을 부르지만 차는 벗을 부르지 않는다.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동다송”). 함께 차를 마셔도 차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 <찻잔 속의 낙원>, «자전거 여행»에서
그의 글과 여행은 논리적 억압이 없어서 읽기 편하고, 정직해서 허무적이고, 허무에 함락당하지 않아서 아름답다. 그는 위험한 편견과 오류에 이르를 수도 있으나 김훈의 세계에서는 ‘편견’과 ‘오류’라는 개념마저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는 ‘편견’도 ‘오류’도 아무런 걸림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선정禪定에 들듯 사물을 응대하는 거사居士를 보았고, 협곡 팔십리에서 고요하게 흐르는 명징한 섬진강의 수면을 보았다. 한 인간에게 만상을 비추는 명징한 수면과 만상을 재조직하는 사회적 논리성을 동시에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그의 팬이다. 그가 861번 국도를 자건거를 타고 지나갔다고 하지만, 어쩐지 그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명징한 수면을 보았던 그 자리에 아직도 그대로 서 있을 것만 같다. 누구보다도 육체를 가열하게 밀고 나가고 인간 육체의 정직성에 매료당한 그가 그토록 정적인 응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육체의 위대한 생산력을 모르고 있는 글쟁이들의 허약한 분노, 가짜 고통, 허세의 논리를 고발한다. 그는 그러한 것들을 스르릉 베었고, 차를 마셨다.
50년대, 겨울이 다가올 무렵 수연 스님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무턱대고 쌍계사로 갔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찰은 두어 명의 스님과 보살만이 지키던 시절이었고, 수연 스님은 그해 겨울을 쌍계사에서 과동할 생각이었다. 쌍계사에 도착해보니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 생활하는 자취가 있는지라 저녁을 준비하였다. 그때 젊은 스님이 사찰에 들어왔고 수연 스님은 그 스님에게 이번 겨울을 쌍계사에서 지내야겠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하여 두 젊은 스님은 단 둘이 쌍계사에서 3개월 간의 동안거에 들어갔고, 젊음이다운 철저한 수칙으로 동안거를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안거가 끝나는 해제 전날 원래 쌍계사에서 수행하던 스님이 몸이 아파 누웠고, 도무지 차도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수연은 죽을 쑤어놓고는 잠깐 아랫마을에 다녀오겠다며 쌍계사를 내려왔다. 그리고 구례읍으로 가서 약을 지은 뒤, 밤 10시가 다 되어 쌍계사로 돌아왔다. 이 약을 받아마신 젊은 스님은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밤 10시 가까이 되어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새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의 손에는 약사발이 들려 있었다.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 약을 마시라는 것이다.
이때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의 헌신적인 정성에 나는 어린애처럼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는 말없이 내 손을 꼬옥 쥐어주었다.
암자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이라야 40여리[실제로는 50리가 넘는다] 밖에 있는 구례읍이다. 그 무렵의 교통수단이라고는 구례 장날에만 장꾼을 싣고 다니는 트럭이 있었을 뿐. 그러니까 그날은 장날도 아니었다. 그는 장장 80리 길을 걸어서 다녀온 것이다.
서로가 돈 한푼 없는 처지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구례까지 걸어가 탁발을 하였으리라. 그 돈으로 약을 지어온 것이다. 그리고 머나먼 밤길을 걸어와 약을 달였던 것이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나는 평생 처음 온 심신으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도반의 정(情)이 어떤 것인지도 비로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간절한 정성에 낫지 않을 병이 어디 있을까. 다리가 좀 휘청거리긴 했지만, 그 다음날로 나는 기동하게 되었다.
— «무소유»에서
법정 스님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바로 이 수연 스님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 법정 스님은 출가한 지 얼마 안 되어 효봉선사를 모시고 단 둘이 쌍계사에서 수행중이었고, 효봉선사가 잠시 네팔에 갔던 시기에 수연 스님과 만났던 것이다. 수연 스님은 요리 솜씨가 일품이었으며, 맑은 시선, 조용한 미소, 따뜻한 손을 가진 스님이었다.
봄볕처럼 따사로왔던 그 수연水然 스님이 해제 일미를 맛볼 틈도 없이 섬진강변을 걸었던 것이다.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 도보로 답사한 결과 구례 운조루에서 화개나루까지 6시간 가까이 걸렸다. 화개나루에서 쌍계사까지는 대략 시간 반 걸린다. 구례 운조루에서 구례읍까지는 다시 한 시간 가량 걸리니까, 쌍계사에서 구례읍까지는 빨리 걸어도 일곱시간은 잡아야 한다. 수연은 그 길을 하루 나절에 왕복하였다. 그는 섬진강 협곡 80리를 걸으면서 야생화도 스쳐만 보았을 것이고, 수면 위의 산경山景이 얼핏 눈에 들 때는 그의 마음에 병자의 시든 얼굴이 어렸을 일이다. 그렇게 빨리 걸었을 것이나 탁발을 하고 약을 지어 돌아오던 도중에 이미 해는 기울었다. 섬진강, 지리산, 백운산, 달빛, 별빛만이 현존할 뿐 마을 하나 없었을 협곡 팔십 리를 통과하며 수연은 만물을 품는 어둠을 보았으리라. 그리고 거대한 강물의 적묵寂默한 소리를 들었으리라. 누구도 보지 못했던 비늘처럼 트는 능선과 누구도 듣지 못했던 광대무변한 소리를 체득하며 걸었던 수연은, 만물의 혼곤한 잠과 숨결 속에 빠져들 듯 도반의 병고 속으로 침몰하였으리라. 약 한 사발을 위한 거대한 육체적 투쟁이 벌어졌고 이 투쟁 속에서 만물은 내내 은폐하고 있었던 상像을 드러내었을 것이니, 수연 스님은 기쁘게 몸을 소실시켰고 법정 스님은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한 인간의 일상에서 여타 예술보다 더 위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쌍계사 대웅전 동편에 있는 마애불.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이 소박한 마애불은, 쌍계사를 들렀던 모든 이들을 사계절을 음미하듯 되풀이하여 보았으리라. 어스름이 깔리던 무렵이다. 대웅전 기둥에는 외로움이 기대어 서 있었다.
쌍계사에 들렀다. 어스름이 질 무렵 마애불을 촬영하였다. 대웅전 기둥에 비스름히 기대 서서 외로운 한 여인이 마애불과 마애불을 촬영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대웅전 뒤를 둘러보았다. 저녁 예불이 시작되었다. 수행자들의 독경소리와 예불소리가 종일토록 걸었던 내 몸에 접촉하였다. 내 몸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고 손쓸 틈이 없었다. 스님들의 배례는 서고 무릎꿇고 엎드리고 절하고를 절도 있게 반복하였다. 맺고 푸는 동작이 길지도 짧지도 않게 절묘하였고, 그 절묘함에 빈틈의 여지없이 호응하는 목탁 소리와 음성은 내 몸에만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산사의 공간 전체로 동시적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대웅전 옆문에는 나란한 흰 고무신들 한 켠에 등산화 한 켤레가 수줍게 놓여 있었다. 엎드려 절하는 부복의 순간에 여인의 머리칼이 대웅전 문밖으로 내비쳤고, 순간 외로웠다. 나는 미약한 발걸음 소리마저 낼 수 없어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 만법귀일의 장에서는 한 명이 외로우면 타인도 풍경도 외로와지는 것인가. 정지한 내 몸은 시방의 풍경과 시방의 소리와 구도의 음성 속으로 자꾸만 산화하는 것만 같았다. 내 몸과 마음은 바람을 타고 훌훌 흩어졌고, 쌍계의 물이 되어 흘렀다. 내 몸은 소리와 색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허공처럼 비어버렸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어둠은 내 몸을 투과하여 나렸다.
이 근원적인 경험이 내게 주어졌다. 훗날 쌍계사를 생각할 때마다 내게는 언제나 이 경험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 이런 경험을 인문화시키면, 예술 경험이 성립할 것이다. 어느 여행안내서에는 쌍계사에는 뛰어난 예술작품이 없으니 오히려 연곡사를 비중 있게 들를 것을 권하고 있으나, 예술은 유형적인 작품만을 그 존재 양식으로 삼지는 않는다. 법정 스님과 쌍계사와의 관계 역시 그렇다:
그러면서도 단 한군데만은 차마 가볼 수 없는 데가 있었다. 아니 참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기 때문에 가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구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배웠고, 또한 빈틈없는 정진으로 禪悅을 느끼던 그런 도량이라 두고두고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 있는 쌍계사 탑전!
그곳에서 나는 16,7년 전 은사인 효봉선사를 모시고 단둘이서 안거를 했다. 선사에게서 문자를 통해 배우기는 初發心自警文 한 권밖에 없었지만, 이곳 지리산 시절 일상생활을 통해서 입은 감화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 <나그네길에서>, «영혼의 모음»에서
법정 스님은 은사 효봉선사로부터 받은 절대적인 감화 때문에 쌍계사를 다시 방문하기를 두려워하였다. 더구나 수연 스님을 만난 곳이 아니던가. 그곳은 하나의 성소이자 예술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을 통하여 그러한 장소를 만난다는 것은 축복이고 근원적인 경험이지만, 이는 강인한 정신보다는 오히려 소진한 육체에 더 가까이 있다. 섬진강을 편력한 누군가의 정신세계와 법당 마루에 쓸리던 누군가의 외로운 머리칼과 산사에서의 누군가의 원체험이 그렇게 육체적인 나에게로 왔다. 이번 여행은 쌍계사 이후에도 사나흘 이어졌으나, 여행 첫날 때이르게 절정을 맞이하고 말았다.[2003년 글]
다시 읽어도 정신이 오롯해지는 글입니다. ‘연곡사 해우소 그림자’ 사진은 대단하고…. 그런데 첫문장에서, (지리산이) 해야 편안한 숨으로 읽혀지는데요 , 나만 그런가…
연곡사 해우소는 선암사 뒷깐을 모방한 듯합니다. 참 좋더군요. 오후의 햇살이 나무 그림자를 드리울 때 해우소 벽은 한 편의 그림이 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섬세한 지적 감사합니다. 이런 조언들이 제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고싱가숲 님, 새로 봄이 오면 외박을 내어 글에서 쓰신 섬진강 길을 따라가 볼까 합니다. 다만 이틀의 일정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게 아쉽고, 제가 복무중인 왜관에서 구례까지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참 어렵군요! 고싱가숲 님의 경험으로는 무엇을 타는 게 좋고, 가선 어디서 자는 게 좋겠습니까?
다경 님 반갑습니다. 이틀 일정으로 구례까지 가는 것은 무리일 듯합니다. 굳이 가시려면 대구에서 남원으로 가신 뒤,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할 것입니다. 대구-구례간 버스는 하루에 한두 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숙박은 아무래도 화엄사 입구나 구례읍내가 무난할 듯합니다. 화엄사에서 일박하시는 것도 추천해 봅니다. (자세한 사항은 화엄사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고요.)
제 생각에는 이틀 일정이라면 섬진강 도보여행은 다음 기회로 미루시고, 왜관 인근의 팔공산 자락을 여행하심이 어떨런지요.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엮은 «팔공산자락»(돌베개, 답사여행의 길잡이8)을 안내서로 추천합니다. 특별히 이 답사책은 흥선스님께서 직접 집필하신 것인만큼, 그 안목이나 글솜씨는 가히 다른 답사책과 비교가 안됩니다.
저는 미국 시카고에 살고 있는 이남이라는 주부이며 직장인입니다. 지금 경희 사이버대학교에 4학년에 재학중이랍니다. 법정스님 글 중 ‘ 잊을 수 없는 사람” 수연스님에 대한 자료가 필요해서 검색하다가 들어와 흠뻑 빠졌습니다. 좋은 글 감사하고 잘 참고합니다. 감사합니다.
먼곳에서 방문하셨군요, 이남님 반갑습니다. 이국생활 중에는 특히 고국이 그리운 법인데, 불교에 친밀한 분이시라면 더욱 그렇겠네요. 외국에서 작은 개울을 만났을 때 밀려오는 그리움 같은 것이겠지요. 잘 지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