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로 가는 길은 어느 답사지를 가는 것보다 설레인다. 진도행 고속버스가 바다와 들녘이 이웃한 해남에 들어서면서부터, 남도의 물빛은 흡사 진한 녹차의 빛깔처럼, 흡사 후지필름의 진하고 부드러운 녹색처럼, 가슴을 풀풀 휘감다가 풀어지기를 하염없이 되풀이한다. 동해 바다의 청량함도 아니며 서해 바다의 질펀함도 아니다. “물빛 라일락의 빛”(서정주)처럼, 그 질감이 아련하다. 색채가 육안의 빛깔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 피부의 촉감으로 다가온다. 진도대교를 건널 때까지도 그 느낌을 차마 떨치지 못한다. 명량해전이라는 그 긴박하고 절망적인 싸움에 대한 유감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다. 진도대교로 건너 산 하나를 접어들면서 진도의 들녘이 눈에 들 때 비로소 그 질감을 잊게 되지만, 언제고 되살아날 정도로 그 감촉은 경이롭다.
소치는 연못의 섬 위에 목백일홍을 심었다. 주변이 많이 변했지만 이 나무만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는 이 화려함을 보았겠지만 보지 못했다는 듯 살았다.
읍내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밥을 먹고 십분 정도 차를 타니 운림산방 앞에 도착한다. 이리하여 진도의 첫 인상은 진도의 들녘과 운림산방이 된다. 월요일 오후 4시 무렵. 휴가철이 끝난 뒤라 한적하다. 봉긋한 첨찰산 자락이 먼저 보인다. 그리고 소치의 <선면산수도>와 남농의 <운림산방 소견>에 그려진 소나무와 흡사한 고송(孤松)이 들머리에 서 있다. 잔디밭에 외따로 서 있는 이 소나무는 운림산방의 표지로서 역할만 할 뿐 운림산방 주인의 나무로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운림산방의 주변 풍경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44년에 그려진 남농 허건의 <운림산방 소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운림산방은 초가 세 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주변은 채마밭 크기의 조그만 밭들만 간간히 보일 뿐 여타 민가와 동떨어진 산골에 처해 있다. 산중유거에 걸맞는다. 초가 앞에는 현재 조성된 골격과는 다르게 허투로 둥글게 감도는 방지가 있고, 방지 속에 섬이 있고, 섬 위에 목백일홍이 있다. 그 목백일홍은 소치가 직접 심은 나무로서 현재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집을 짓고 연못을 파고 꽃과 나무를 심었던 소치는 사라졌지만, 나무는 남아 있어 꽃을 피운다.
소치 허련의 일생은 인연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릴 적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으나, 벽촌 진도에서는 그림을 가르쳐 줄 인물이 없었다. 화첩이나 그림마저 구할 수 없어 그림의 교본이라고는 «삼강행실도»에 그려진 목판화가 고작이었다. 젊은날의 정열이 사라질 즈음의 스물 여덟 살, 그는 그림에 대한 정열을 억누를 길 없어 벽파진으로 달려가 배에 몸을 싣는다. 해남 연동에 가면 그림을 볼 수 있다는 소문만을 의지한 채, 그 누구의 추천도 없이, 막무가내로 명문 해남 윤씨가의 녹우당을 찾아간다. 공재 윤두서의 손자 종민은 생면부지의 허름한 길손을 맞아들이고 선대로부터 소장하고 있던 서화첩을 모두 내어준다. 소치는 평생 처음 접하는 명화들을 보고 흥분과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녹우당 사랑채에 머물며 그림을 완상한다. 그때 비로소 그림 그리는 데에 법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침식을 잊는다. 어릴적부터 그림과 화첩을 실컷 보았던 녹우당의 주인은 소치의 그림에 대한 경이로운 사랑에 감화를 받는다. 마침내 소치는 윤씨가로부터 그림들을 빌려가지고 두륜산 대둔사의 초의선사를 가 뵙는다.
초의선사가 은거하였던 대둔사의 일지암. 소치는 이곳에서 수년간 초의의 “물욕 밖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글을 쓰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경을 읽었다. 진도 운림산방에서 해남의 녹우당, 대둔사, 일지암에 이르는 답사 길은 소치의 “인연의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다
녹우당에서 대둔사까지는 20여 리. 두어 시간 걸음이면 족하다. 일지암 초의선사의 일상에 관한 기록은 소치의 기록이 아마도 가장 상세할 정도로, 그는 그와 깊이 만난다. 소치는 일지암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배우고 시를 읊고 경을 읽는다. 그리고 매일 이야기를 나누며 초의선사의 “물욕 밖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듣는다.
그러하기를 몇 년. 다산의 강진 유배 시절 다산과 자주 왕래하였던 초의선사는, 이제 해배되어 고향 두릉(양평군 양수리)으로 귀향한 다산을 만나려 일지암을 나서는 길에, 소치가 공재 윤두서의 그림을 방작한 것과 소치 스스로 그린 그림을 챙긴다. 그리고 두릉 가는 도중에 추사에게 소치의 그림들을 전달한다. 추사는 소치를 서울로 부른다. 소치 나이 서른 두 살.
진도의 미미한 평민 소치와 일세를 풍미하고 있던 추사는 그렇게 만난다. 소치는 녹우당과 일지암이라는 두 인연을 거쳐 단숨에, 기적처럼, 일생의 스승을 만난다. 소치는 추사의 집에 머물며 일년 가량 추사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그러나, 잠시 추사가 본가가 있는 예산에 내려가 있던 때 소치는 인사를 갔고, 그날 밤 스승은 압송되어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다. 소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공주 마곡사 상원암에 10여일 머문 뒤, 강경포에서 배를 타고 고향 진도로 내려온다. 고향에서 과동한 후 해남을 거쳐 제주를 방문하여 수 개월 머문다. 유배지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다. 제주를 방문하지 못할 때는 서신을 왕래한다. 이러한 식의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추사가 8년 뒤 해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제 소치는 마흔을 넘었다.
소치의 사십대는 화가로서의 명성을 본격적으로 떨치기 시작한 시점이다. 경력의 정점으로서 그는 궁궐 안으로 들어가 수 차례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헌종의 죽음 이후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재개되면서 김정희, 권돈인, 조희룡 등 소치의 후견인들이 유배를 당한다. 이후, 소치가 사십대 중반을 지나고서 초의를 재방문하고, 다시 해배된 과천의 스승을 찾아뵙고, 다산의 묘소에 참배하고 하는 등 일련의 절차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수순처럼 여겨진다.
노년의 스승이 제자의 화실을 위해 써 준 <소허암>. 소치는 스승의 글을 손수 판각하여 운림산방 편액으로 걸었다. 그리고 초의로부터 매화 한 그루를 얻어 와 심었다
마침내 마흔 아홉살, 스승의 죽음을 전후하여 소치는 그동안 세상을 주유(周遊)하던 일들을 뒤로 하고 고향 진도로 내려온다. 그리고 산정에 오르면 진도의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첨찰산 아래에 운림산방을 짓는다. 소치는 스승이 자신의 화실을 위해 써 준 <小許庵>을 손수 판각하여 편액으로 건다. 그해 겨울, 초의는 일지암 뜨락에 있는 백매화 자목 한 그루를 소치에게 전해준다. 소치는 백매를 운림산방의 우물가에 심고 시 한 수를 남긴다. 인연의 실크로드를 타고 만난 두 스승은 그렇게 소치의 운림산방에 물질적 정표로 남게 된다.
그는 운림산방에서 삼년을 지낸다. 동생과 조카의 잇달은 죽음 이후 다시 세상을 주유한다. 자신의 화업을 이을 것으로 크게 기대했던 장남도 죽는다. 다시는 진도 벽파진에 가닿지 못할 것으로 여겼지만, 그는 <선면산수도>를 그리고 화제(畵題)로 나대경의 <山靜日長>을 쓰면서 문득 뭔가를 예감한 듯하다. <선면산수도>를 그린 해는 때마침 초의선사마저 입적한 해이다. 그는 <선면산수도>를 그린 한 해 뒤에 그 풍경 속으로 빨려들 듯, 표표히 배를 타고 운림산방으로 재귀한다. 그림 속 노인처럼, 이제 그는 나이 예순이 되었다.
내 집은 산골에 있다. 매양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면 푸른 이끼가 뜰에 깔리고 낙화는 길바닥에 가득하다. 사립문에는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없으나 솔그림자는 길고 짧게 드리우고, 새소리 높았다 낮았다 하는데 낮잠을 즐긴다. 이윽고 나는 샘물을 긷고 솔가지를 주워다 쓴 차를 달여 마시고는 생각나는 대로 «주역» «국풍» «좌씨전» «이소»와 태사공의 글과 도연명, 두자미의 시, 한퇴지, 소자첨의 문장 등을 수 편 읽고서 조용히 산길을 거닐며 송죽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사슴이나 송아지와 더불어 긴 숲 사이에 함께 뒹굴기도 하고 앉아서 시냇물을 구경하기도 하며 또 냇물로 양치질하거나 발을 씻는다. […] 다시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에 섰노라면, 지는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려 사양이 붉고 푸른 색깔이 수만 가지로 변하며 소 타고 돌아오는 목동들의 피리 소리에 맞춰 달이 앞 시내에 돋아오른다.
─ 나대경, <山靜日長>
나대경의 글 <山靜日長>을 화제로 삼은 <선면산수도>. 1866년. 서울대박물관 소장. 이 그림을 그린 한 해 뒤, 소치는 운림산방으로 재귀한다. 그림 속 노인은 지는 해 서산 마루에 걸려 풍경의 빛깔이 속속들이 변할 즈음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은일을 추구하는 나대경의 글에 깊이 잠겨 운림산방으로 돌아온 것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운명적으로 규정한 초의와 추사가 이 세상을 떠나버린 시절에, 초의와 추사의 물질적 정표가 남아 있는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 꿈결같은 인연들을 아련히 떠올리며 첨찰산 아래 산골집 빈 방에서 자신의 과거를 기록하려고 붓을 드는 순간, 과연, 그는 나대경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간 자신을 본다:
沙村의 차가운 방아는 석양 따라 멀리 보이고, 溪寺의 맑은 종소리는 바람결에 문득 들린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니 실로 전생의 인연을 알겠고, 지난날 놀던 임을 회상해보니 모두 아득한 꿈이었더라. […] 바다를 표류하면서 돌아올 때는 늘그막에 슬픔이 늘어감을 어쩔 수 없었다. 열 번이나 궁궐에 드나들었건만 성취된 것은 무엇이며, 세 번이나 제주에 들어갔건만 왕래한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옛날 그대로 살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소광한 곳에 서서 홀로 슬퍼하며, 서책을 버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 «夢緣錄» 自序에서(김영호 번역의 «소치실록»에 따름. 이하 동일)
운림산방이 자리한 사천 마을의 방아가 노을 빛에 휩싸인 채 서서히 묵빛에 잠길 무렵 인근 쌍계사의 저녁 종소리 들린다. 두웅, 그리고 두웅, 그리고 두우웅. 문득, 지난날 모든 것이 저녁 종소리에 실려 아득히 스러진다. 붙들지 못한다.
꿈이더라. 벽파진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건너가 해남, 서울, 제주, 과천, 양수리를 주유하였던 일들이 꿈이더라. 임금의 총애 속에 궁궐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던 일, 일생의 스승 김정희를 뵈오려 유배지 제주도를 드나들었던 일,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더라. 나이 예순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커다란 긍지마저 산사의 종소리에 실려 보내버린다. 운림산방 앞에서 그는 저 멀리 황혼 속에서 그림자처럼 윤회하는 방아의 물레를 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 물레를 돌리는 차가운 낙수 소리 들리는가, 그러나 두우웅, 종소리. 들린다, 사라진다.
<호로첩>에 있는, 소치가 추사의 그림을 방작한 그림. <호로첩>은 소치가 동기창, 미우인, 겸재, 이광사 등의 것을 베낀 그림을 모아놓은 화첩이다. 환갑을 맞이한 그는 누구보다도 스승의 그림을 많이 방작하였다.
그는 첨찰산 아래 운림산방에 머물면서 “쌍계사의 저녁 종소리”와 “사천 마을의 저녁노을”를 무엇보다 사랑하였다. 그 소슬한 마음결로 «夢緣錄»을 저술하고 나서, 그 이듬해, 흡사 그림을 처음 배우기라도 하는 듯, 중국 화가와 조선 화가의 그림을 하나하나 베끼기 시작한다. «夢緣錄»을 쓰며 꿈결같은 인연을 정리하듯, 그림을 방작하면서 자신의 필선과 준법을 정리한다. 동기창의 간결하고 담백한 필선과 미우인의 부드러운 미점산수를 함께 베껴보며 자신의 산수화를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필선이 까실한 스승의 그림을 가장 많이 방작한다. 그리고 이 방작들을 모아 <호로첩>으로 묶는다. 그는 이 화첩을 엮으며 무엇을 정리하였던 것일까.
운림산방으로 돌아와 산사의 종소리를 들으며 우두커니 황혼녘을 보았던 그는, 이제 환갑을 맞으며 호로병을 손에 쥐듯 <호로첩>을 쥐고 선다. 스승도 없다. 꿈도 없다. 그는 나이 일흔이 되어 다시 한 번 상경하여 세상을 주유한다. 그리고 돌아온다. 세상을 주유함도 산방에 거함도 서로 다르지 않다. 이제, “만 가지 사념은 모두 사라졌다. […] 때로는 바람 부는 비탈길을 거닐기도 하고, 때로는 대나무 우거진 숲길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날마다 듣는 것이라고는 깊숙한 숲 속에서 함께 울려 오는 새 소리뿐이요, 밤마다 지내며 벗이 되는 것이라고는 밝은 달과 별뿐이었다.”(72세에 쓴 «續緣錄»에서)
만 가지 사념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집안의 가난이 보인다. 뜬구름처럼 각처를 식객으로 전전하며 그림을 그려주었던 소치는, 이제 그 허망함을 안다. 인연은 무엇이고 그림은 무엇이고 시는 무엇인가. 만 가지 인연이 모두 끝나고 만 가지 서화로 남았지만, 그것은 무엇이더냐. 그 스스로는 운림산방으로 돌아와 산사의 만종이 되고 황혼이 되고 산과 계곡이 되고 초가집이 되고 꽃과 대나무가 되었지만, 인간이 먹어야 하는 하루 한 끼의 밥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집안의 가난을 안다:
매양 잠 안 오는 밤이면 베개를 베고 누운 채 지난날 멀리 주유하던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햇수 동안 고해의 파도 속에 내 머리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지 모릅니다. 어느 하루날 노를 돌리니 만 가지 인연들이 모두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극락의 세계입니다. 내가 바로 溪山이요, 내가 草堂이며, 내가 바로 花竹입니다. 산골짜기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산등성이에는 고사리가 가득합니다. 책꽂이에는 책들이 가득하고 눈앞에는 아들과 손자들이 즐비한데, 단지 상자에 가득한 황금이 없소이다.
─ «續緣錄»에서
고향에 돌아와 내가 여행할 때 갖고 다니던 보퉁이를 점검해 보니, 貴人들이 써 준 필묵과 韻士들이 지어준 詩章을 한데 뭉친다면 소에다 실어도 한 바리는 될 것 같더군요.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것은 모두 물에 떠 있는 꽃이요, 물결에 흔들리는 꽃술과 같은 허망한 것입니다. 한 장의 전답 문서만 못하다고나 할까요?
─ «續緣錄»에서
만 가지 인연처럼, 만 가지 그림처럼, 소치가 심은 목백일홍에서 꽃이 떨어져 물에 떠 있다. 이 꽃은 물결 따라 흔들리며 부유하더라. 운림산방 연지는 그 옛날 소치의 법어를 들었다는 듯, 더욱 아름답다. 허망하다.
인생의 대가가 된 소치는 임종할 무렵에는 자신이 거처했던 가옥마저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는 가능하면 가옥도 팔아버리라는 유언을 남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목백일홍도 백매화도, 모두 한꺼번에 팔아치우라고.
가옥은 병진년에 지어 30년이 되었다. 집 사면에는 나무들이 무성한데 모두 내가 심은 것들이고, 또 갖가지 화훼들은 먼 곳에서 구해 와 기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에는 모두 쓸데없어질 것이다. 곡식을 갈아먹을 논밭은 이미 부족하여 새 곡식이 날 때까지 糧道를 이을 수 없으니, 이 논밭을 갈아서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 만약 한꺼번에 모두 살 사람이 있거든 팔아 버리고, 반드시 가족들을 거느리고 읍으로 가서 살아라. […] 杜子美가 曹覇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다만 자고로 이름난 사람들을 보아라. 죽을 때까지 곤궁하게 지냈도다” 하였다. 내가 一世에 三絶이라는 이름을 들었으니 내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어찌 그 위에 부귀를 구했겠는가. 그것은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고 귀신이 반드시 막을 것이니, 처음부터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 소치의 유언에서
소치는 운림산방에 기거하며 86세의 수를 누린다. 그는 아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늘 “작대기 산수를 그려라”고 말하였다. 그 가르침은 곧 자신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였다. 남종문인화의 전통을 빌어 인간 정신의 가파르고 절제된 세계를 가일층 드러내고자 하였던 만년의 소치는, 대나무 조각으로 죽죽 그은 듯한 대범하고 힘찬 필선의 그림을 원하였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물기 적은 붓으로 간결하고 가파르게 그리면서 촉촉하고 진한 농담을 걷어낸다.
나이 여든 살이 넘어 그린 묵매도는 그의 걸작이다. 매화나무의 가지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뚝뚝 꺾이듯 곧게 곧게 뻗어가고, 그 가파르고 통렬한 가지에 꽃은 이슬방울처럼 달려 있다. 꽃은 누가 볼까봐 숨어 있는 듯하다. 바짝 여윈 가지에 서린 노매(老梅)의 기품이 핏발처럼 다가오다가도, 망울을 갓 터뜨린 은연한 꽃잎으로 하여 생명력이 감지된다. 특히 중앙 한 폭에서 찌를 듯 수직으로 치솟는 잔가지는 그 기세가 강하여 열 폭 병풍을 찢어버리는 듯하다가도 어쩐지 이내 청초하다. 산수화는 필선과 준법만으로 비평을 일관할 수도 있지만, 이 노매도는 그러한 게으른 방식을 거부한다. 다만 절실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다가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매화의 기품은 꽃이 아니라 기실 가지에 깃들어 있음을 알려주겠다는 듯, 그는 미려한 모든 것을 떨쳐내고 허망함을 최소화한다. 육체적으로는 생동한 기운이 모자랄 수밖에 없는 노년에도 그는 정신적으로 더욱 준엄하고 더욱 꺾이지 않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이 노매도가 초의선사로부터 얻어 와 우물가에 심은 백매를 완상하면서 그려졌다면 이는 인연을 완상하고 스승들을 완상한 결과일 터이니, 더욱 엄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백매가 특히 수형이 빼어났다는 사실은 그러한 추정의 실제성을 높혀 준다.
그러나, 초의가 소치에게 건네주었던 백매는 지금 운림산방에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 때 그 매화의 수형과 자태에 홀린 일본 순사가 운림산방에서 관사로 강제로 이식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그는 백매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하였으나 진도읍 임태영 씨의 선친이 통사정하며 거금을 주고 사들였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그 백매는 10여년 전에 죽었고 다만 수령 30년의 자목 네 그루가 아직도 꽃을 피우고 있다. 올 봄 신문기사에 따르면 곧 운림산방으로 이식할 예정이라고 보도한 것으로 미루어, 내년 봄에는 운림산방에서 그 백매의 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 가지 인연이 모두 정리되고 그 꽃이 피어나면, 다시, 인연을 삼가라며 꽃이 질 것이다.
이 운림산방에서 붓을 든 이는 소치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 미산 허영, 손자 남농 허건, 그리고 족친인 의재 허백련이다. 그들은 남도의 땅을 예술의 고장으로 만든 장본인들이다. 소치는 이 운림산방에서 붓을 들었으나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소치의 죽음 이후에 미산은 이 집을 떠나 강진, 목포로 이주하였다.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미산의 아들 남농은 궁벽한 전세집 뒷마루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추위를 잊은 채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동상에 걸렸고 한쪽 다리를 절단하였다. 그래도 그림을 그렸다. 6,70년대 경제발전의 여파와 함께 그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남농은 그림을 그려 거부가 된다. 그 부로 그는 쇠락했던 첨찰산 운림산방을 거둬들여 정비한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운림산방을 방문하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문인화 입문을 위한 통과의례와도 같다. 의재 허백련을 마지막으로 전통문인화는 맥이 끊어졌고, 이제 서양식 교육을 받은 화가만 남았다. 오늘날, 시를 쓰고 경을 읽는 화가는 거의 없다. 경(經)을 읽는다 함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릴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그러한 마음 공부는 종교적 영역에서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또, 종교적 세계에 들어가면 교리화의 세례를 받으며 시적인 세계를 상실한 위험이 많다. 인간 교육에 있어서 거의 모든 것이 분화되어 총체성을 상실한 현대는 불행하다.
시서화 모두 뛰어난 삼절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소치는 자서전 격인 «夢緣錄», «續緣錄»에서 비교할 수 없이 심원한 내면과 통찰을 내비치고 있다. 그 심원한 내면은 그의 그림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내면의 변화와 함께 그의 그림도 변한다. 그림은 시기별로 변하지만, 그러나, 전통으로부터 배운 화법을 끝내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 화법 안에서도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혹은, 내면 세계가 꿈틀대는데도 그것을 절제하여 화법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개성을 폭발시켜 현대적인 예술성을 확보할 수도 있겠지만, 옛 사람들은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고, 속된 일이기도 하였다. 이제는 거의 복원 불가능해 뵈는 “삼절의 세계” 앞에서, 어쩔 수없이, 현대의 독보적인 개성이 가진 예술성에 눈을 돌리기에는 뭔가가 불편하고 싫다. 그러한 예술성 속에 나는 편히 안기거나 그것을 흠모할 자신이 없다. 그리하여, 운림산방은 소치의 예술세계뿐만 아니라 현대의 예술세계에 대한 조용한 음미의 자리가 된다.
진도로 들어올 때의 설레임은 어느새 가라앉고, 만 가지 상념도 모두 사라지고, 이제 사천리 마을의 운림산방에 황혼이 든다, 산사의 종소리 울리라고, 노대가(老大家)가 사랑하였던 낮고 느린 음악 이 세상에 아득하니 퍼지라고, 두우웅, 두우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