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때이르게 바젤대학 교수직에 초빙된 니체는, 교수직 취임을 전후하여 역설적이게도 대학시절 자신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준 고전문헌학에 대한 심각한 의혹을 품고 있었다. 그 의혹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이라는 강연과 함께 교수직에 취임하였으나, 이미 그때 그는 바그너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고대 비극의 독일적 재현을 갈급하게 염원하는 비학문적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니체를 미궁 속으로 끌어들인 미노타우로스 바그너는 니체로서는 고대적인 신성이었으며, 차라리 니체의 미궁 자체였다.
쇼펜하우어의 교량 위에서 이루어진 그 신성과의 첫 만남 이후, 바그너는 시적 모티브에 의한 음악을 역설하며 <베토벤>을 써내려갔고 니체는 포성이 울리는 야전에서 시인과 음악가의 합일을 꿈꾸며 <디오뉘소스적 세계관>을 메모해 나갔다: “베토벤에 대한 당신의 찬란한 기념논문이 탄생하던 때, 바로 그 시기에, 그러니까 막 발발한 전쟁의 공포스러움과 숭고함 속에서 저는 이 사상에 집중하였습니다”(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
다른 곳에서 엇비슷한 작업을 한 두 사람은 “구름 한점 스치지 않았던 화창한 하늘 아래” 트립셴에서 1870년 12월 각기 <베토벤>과 <디오뉘소스적 세계관> 일부를 선물하였고, 니체는 다시 겨울의 바젤로 돌아와 <디오뉘소스적 세계관>으로 응집된 자신의 사상을 풀어쓰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이미 저술해 두었던 <소크라테스와 비극>을 합하고, 바그너에게서 현실화되고 있다고 느낀 비극의 재생과 관련하여 후반부를 집필하였다. 이러한 탄생 과정을 거친 1872년 «비극의 탄생»은 고전문헌학계에는 학문의 죽음을 뜻했던 반면에, 아카데미 학자들을 공장노동자로 깎아보는 대가 바그너에게는 자신의 음악극을 변호할 절호의 이론가의 탄생이었다.
확실히 바그너 추종자로서의 니체가 쓴 이 책은, 십수년 뒤 바그너로부터 자유로와진 정신 니체가 보기에는, “의문스러운 책”이자 “불가능한 책”, “청년의 용기와 청년의 침울이 가득한 청년의 작품”이다. “청년의 오류”, “지나친 장황함”, “질풍노도”가 스며들어 있는 “처녀작”이다. 이 “신비적이고 거의 마이아데스적이기까지 한 영혼”은 “노년의 문제”, “청년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제”를 풀어내느라 문체상으로도 “좋지 못하며, 둔중하며, 힘겨우며, 비유가 난무하고 꼬여 있으며, 감상적이며, 여기저기에서 여성적으로 보일 정도로 달며, 속도가 불규칙적”이다.
1886년 니체의 이 <자기비판의 시도>는 «비극의 탄생»을 번역하려는 역자 모두에게 이 비판을 정당화시켜 줄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 이 정당한 자기비판, 혹은 하나의 해석, 혹은 하나의 관점은, 그러나 이 책의 “새로운 영혼”이 발굴하여 세상에 공개한 “디오뉘소스적인 것”과 “퇴행으로서의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만큼은 표적으로 삼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디오뉘소스적인 것”이 이후에 어떠한 내용의 변화를 겪든, 그리고 “소크라테스”라는 총화된 명칭이 이후에 어떠한 명칭을 달게 되든, 그 두 명명으로 수렴되는 그 무엇인가가 이 책에서 구체적이고 시초적인 형태를 띠고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디오뉘소스적인 것은 1장~10장, 소크라테스는 11장~15장에서.
그러나, 뒷장들에서 겨냥하고 있는 목표는 후기의 니체로서는 진정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미로로 들어선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에서 디오뉘소스적인 것을 발견하였고, 바그너의 음악극을 아폴론적인 서사언어와 디오뉘소스적인 관현악의 합일을 위한 시도라고 보았던 니체가 대가 바그너의 사도로서 그 모습을 선연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확실히 자기비판하고 있는 1886년의 니체가 아니다. 예술, 더 좁혀서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삶의 구원을 보았던 과거의 니체는, 이제 <자기비판의 시도>를 쓸 무렵에 그는 바그너의 영토였던 트립셴, 바이로이트를 떠나 영롱한 햇살의 질스 마리아를 소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1872년,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이 연초에 출간된다.
트렙셴에서는 니체의 책을 우호적으로, 아니 열광적으로 받아들임: “. . . 정오에, 니체 교수의 책에 몹시 자극 받고 흥분한 리하르트를 보다. 그는 이 경험을 한 것에 대해 행복을 느끼다; 그가 니체가 자기에게 온 다음 자기 그림을 그렸던 렌바흐가 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다. 그리고 자기가 십년 전에 죽기라도 했더라면, 자기 인생이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랬더라면 자기의 추억은 어느 세계의 혼돈 속에 . . . 머물러 있었을까를 생각하다; 그는 나를 두고 아폴론의 여사제라고 칭하고는 나는 아폴론적인 요소, 자신은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라고 칭하다. . . 저녁에 우리는 정말 찬란한 니체의 글을 읽다, 리하르트는 이제 독일에서 위대한 말씀을 이끌고 나갈 사람들을 생각하다, 그리고 이 책이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를 자문하고는 바이로이트에서 니체 교수가 편집인이 될 만한 리뷰를 만들기를 원하다”(코지마, 일기, 1월 3일). “저녁에 다시 니체의 글을 읽다. 리하르트는 연신 만족스러워 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독자들이 이 책에 찬성할 것인가를 자문해 보다. 리하르트는 내게, ‘나는 당신을 디오니소스적으로 그리고 아폴론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하루를 마감하다.”(1월 4일) “[바그너의 누이의 죽음으로] 심각해진 분위기에서 우리는 어제 새로운 책을 읽었다. 연신 기쁨이 교차하다. . . 니체 교수의 책은 저녁에 다 읽다; 리하르트는 ‘이것이 바로 내가 고대하던 책’이라고 말하다”(1월 6일).
프리드리히 리츨은 이미 12월 31일에 라이프치히에서 받아보았던 «비극의 탄생»에 메모를 남긴다: “니체의 책 비극의 탄생(=흥에 넘친 주정)”. 니체가 로데에게: “라이프치히에서는 다시 싸늘한 분위기가 되겠구나. 그곳의 어느 누구도 내게 한 마디 답도 하지 않는다. 리츨조차도—“(1월 28일).
베를린에 체재 중인 바그너로부터의 회신: “바젤에서 당신이 나를 그토록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니,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습니다! . . . 지금 나는 몹시 행복합니다. 당신에게 이 소식을 먼저 전합니다, 사랑하는 벗이여!”(2월 5일)
자신의 “선언”(«비극의 탄생»)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 달라고 요청했던 니체에게 리츨이 답하다: “내 본성 전체로 판단하건대, 나는 . . . 인간사에 대한 역사학적 방향과 역사학적 관찰 쪽에 확고하게 속하므로, 나 역시 한 시대나 현상이 자연스럽게 시드는 과정을 추호도 ‘자살’이라고 표명할 수는 없다는 것, 삶의 개별화를 무슨 퇴보로 인식할 수도 없거니와, 자연에 의하여 혹은 역사적 발전을 통하여 드물게 재능을 얻은, 일종의 특권을 가진 민족의 정신적 삶의 형식과 잠재성이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절대적 규범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 —하나의 종교가 다양한 민족들의 개별성들을 아우르지는 못하며, 아우른 적도 없고 아우를 일도 없으리라는 것. —자네가 ‘알렉산드리아 후예’인 학자더러 ‘인식을 심판하고 오직 예술 속에서만 세계를 변형하는 힘, 구원하고 해방하는 힘을 간파해야 한다’고 충동하는 일은 불가능하네”(2월 14일). 2월 2일에 리츨은 일기에 적는다: “니체의 맹랑한 편지(=대단한 망상)”, 그리고 2월 15일: “니체에게, 엄마[조피 리츨]가 잉태한 니체의 탄생에 대하여”.
1872년 3월 Norddeutschen Allgemeinen Zeitung에 «비극의 탄생»에 대한 에르빈 로데의 소개글이 실리다. 연초에 F.Zarncke의 Litterarische Centralblatt가 로데의 (다른 원고의) 소개글을 거절한 뒤의 일이었다. 니체가 매우 기뻐함.
3월 말에 «비극의 탄생»을 공박하는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의 팜플렛 <미래의 문헌학!>이 발표되다: “. . . 니체 씨는 말을 지켜라, 튀르소스를 들고 인도에서 그리스로 가라, 그러나 학문을 가르쳐야 하는 석좌에서 내려오라; 호랑이와 표범을 슬하에 모으되, 독일의 문헌학 청년들을 모으지는 말라”(32면).
“비극의 탄생”은 이토록 문제적인 작품이다. 고전문헌학자들이 보기에는 촉망받던 젊은 학자의 죽음이며, 바그너가 보기에는 자신의 필생의 과업을 선전할 젊은 영웅의 탄생이며, 니체가 보기에는 어마어마한 문제를 너무 이른 나이에 풀어내고자 고투한 결과이다. 이 작품을 니체 바깥에서 이해하려 들자면 호메로스 서사시의 가벼움과 명랑함, 그리스 서정시와 음악의 관계, 그리스 비극,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 바그너의 음악극, 실러의 소박문학과 감상문학 등을 이해해야 하며, 니체 안에서 이해하려 들자면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주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디오뉘소스적인 것”, “소크라테스”, “아티스트 형이상학”, “현존의 정당화”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둘러싼 논쟁과 논의는 사방으로 퍼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 책의 출간 이후 공식적인 첫 반응은 니체의 벗 로데와 이 둘을 반대하는 고전문헌학자 빌라모비츠였다. 훗날 문헌학 역사주의의 대가에 오른 빌라모비츠는 문헌학의 의의, 문헌학상의 오류 등을 지적하며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니체의 한 말씀 해달라는 편지에도 불구하고 그를 총애했던 스승 리츨은 공적으로 침묵했다. 다만 니체와는 방향이 전적으로 다름을 서신을 통하여 확인해 주었다. 이 책과 함께 니체는 문헌학계에서 매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훗날 고전문헌학 내에서 니체의 의의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한 학자는, 니체와 절친한 동료였던 로데Erwin Rohde를 제외하면, 빌라모비츠 후속세대에서야 나오게 된다. 당대 문헌학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비극의 기원과 관련한 통찰, 즉 디오뉘소스적인 것에 대한 통찰은, 요아힘 라타츠Joachim Latacz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마어마한 후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이 나올 당시만 해도 비극의 기원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간결한 관점 이상을 제시한 학자가 없었으나, 니체는 무섭게 직관하여 그 간결한 관점을 단숨에 넘어간다. 그 일약一躍의 지점에서 호메로스 서사시의 명랑한 조형성, 디오뉘소스의 격정적인 음악성이 등장한다. 비극의 탄생이 이러한 두 예술충동의 결합에서 이루어졌다면, 비극의 죽음은? 에우리피데스, 소크라테스를 비극의 살해자로 보는 관점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이미 제시되었던 것이며, 독일 낭만주의는 이 관점을 확대하여 소크라테스를 삶의 적대자로 보았으며, 니체가 이 영향을 받았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당연히 문헌학계의 비판 내지 침묵은 독일 낭만주의의 관점이 희극적이라는 점, 비극의 기원과 관련한 니체의 서술이 역사적 문헌에 근거하지 않는 과잉 해석이라는 데에 모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극의 탄생과 죽음을 쾌도난마 풀어내는 니체는, 철저한 고증을 생명으로 하고 그 이상 넘어서기를 꺼리고 있던 문헌학을 향해 겨누는 칼이었다. 결국, 고전문헌학 교수 니체는 몇년 뒤 <우리 문헌학자들>을 씀으로써 사실상 고전문헌학에 결별의 서신을 띄운다.
이 결별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영향을 받은 고전문헌학자로는 누구보다도 라인하르트Karl Reinhardt를 거론해야 한다. 그는 그의 저술에서 니체적인 시선을 서늘하게 내비치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니체의 등장과 결별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글, <니체의 아리아드네의 탄식>은 니체에 대한 애석함을 잘 보여준다. 역사주의를 회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고전문헌학과 고전적인 것>이라는 강연 역시 그렇다. 디오뉘소스적인 것에 대한 니체의 천재적인 통찰은 로데의 «그리스인들의 혼, 영혼제의, 불멸신앙»(1893)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통찰과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는 해리슨Jane Ellen Harrison의 대표작, «그리스종교 연구 서설»(1903), «테미스: 그리스종교의 사회적 기원 연구»(1921), 돗즈Eric Robertson Dodds의 «그리스인들과 비이성적인 것»(1951)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 니체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는 오토Walter F. Otto의 «디오뉘소스. 신화와 제의»(1933)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책들이 국내에 출간된 것이 있는지 찾아 보아야 겠습니다. ‘라인하르트’.. 매우 궁금하네요. 그 외의 학자들의 저서들도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니체 읽기’를 기대합니다.
Eric Robertson Dodds의 «그리스인들과 비이성적인 것»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소개한 책들은 저도 일부만 읽었습니다. 안 읽은 책들은 관련 글들에서 소개하고 있어서 알고 있는 셈입니다.
덕분에 을 구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매우 재미있는 텍스트인 것 같습니다. 요즘 읽은 니체의 의 세번째 에세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복습하고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니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혹은 호메로스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그러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길잡이, 부탁드립니다.
앗! 꺽쇠 안에 넣은 글들은 사라지는군요. ‘그리스인들과 비이성적인 것’, ‘도덕의 계보’가 사라졌군요.
웹 표준을 지키려면 <나 >는 html 코드의 기호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꺽쇠 기호를 굳이 쓰려면 <는 문자코드 &lt;로, >는 문자코드 &gt;로 대체해서 쓰시면 됩니다.
이러한 사항은 향후 웹 표준이 확장될 경우에 일반화될 것이므로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서명을 표시했던 괄호 « »역시 각각 &laquo;와 &raquo;라는 문자코드를 써서 표기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