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계곡에서는 오늘도 여전히 신화가 쓰여지고 있다. 사찰의 건립내력과 석물들의 조성내력이 모두 은폐되어 있는 이 시대에, 운주사를 말하고 운주사를 답사하는 일은 하나의 신화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석불과 석탑의 수효도 그렇거니와 그 조각수법, 배치마저 생소하기 짝이 없어 학자들은 이 신화의 땅에서 여지없이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전해 오는 기록도 두엇 뿐이요, 그 내용도 천의 석불과 천의 탑이 있다는 드러난 결과의 기록일 뿐이다.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건립하였다는 기록은 그저 후대의 전설을 그대로 옮긴 것일 뿐이어서 이 역시 신화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궁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학자들은 그리하여 이 땅에 들어서는 답사객들의 꿈과 사랑을 더이상 통제하지 못한다.
만산계곡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석불군. 위로는 뒤틀뒤틀 쌓아올린 일명 ‘거지탑’이라 불리는 5층석탑이 보인다.
이제 만산계곡을 들어서는 자는 누구나 꿈을 꾸어도 된다. 그간 현대의 미술사가들은 학문적인 증빙을 찾을 길 없고 조각수법이 촌스럽다는 이유로 운주사를 등한시하였다. 꿈꾸지 못하는 학자들, 매너리즘에 빠진 학자들을 비웃듯, 그러나 문학가들은 이 천불천탑의 계곡을 혁명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한 시대의 상처가 곧 자신의 상처였던 어느 시인에게는 이곳이 벼락처럼 만난 계시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신화의 땅에 또 하나의 신화를 입히고 있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이곳과 관련한 학문적 증빙을 발굴하여 그 문학의 꿈과 혁명과 좌절을 탈신화화하더라도, 문학이 남긴 강렬한 신화를 결코 지우지는 못하리라.
못생긴 얼굴들, 아니 뭉개진 얼굴들. 정형성도 없고 섬세함도 없고 정교함도 없는 돌덩이같은 석물들. 일명 ‘거지탑’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그저 면석과 옥개석으로 쓸 만한 돌덩이라면 아무 것이나 주워모아 뒤틀뒤틀 쌓아올린 듯한 탑들. 실패꾸리 모양이나 원반형, 떡시루처럼 민속공예품의 조형을 닮은 옥개석의 탑들. 면석에 새겨진 어리숙하고 순진한 선형들. 조각이라기보다는 돌덩이에 가까스로 조형한 듯한 저부조의 석불들. 좌선하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어슷 기대어 있거나 구부정 서 있거나 아예 누워 있기도 한 석불들. 이것들에서 무엇을 바랄 것인가? 이것들에서 무슨 미학적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한 시대를 흥청거리며 풍미하다 사라지곤 하는 허망한 미학적 논리들이 힘을 잃거나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만산계곡에서 아름다움을 얻어내지 못하였다. 운주사의 발굴조사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1984년, 기묘하게도 이 공간이 문학의 날개를 빌어 혁명의 공간으로 승화된 직후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또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문화적 천박함이 절정을 이루고 있던 시대에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또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이제 우리는 불행한 세대가 되어 만산계곡을 거닐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중반까지 허름한 요사채만이 지키고 있던 운주사 일대의 석탑과 석불 주변은 논과 밭이었다. 그리고 […] 사람들의 손길에 훼손되지 않은 신비감과 자연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삶을 위한 생산의 터전과 신앙, 종교적 조형물이 자연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사람의 생활 속에 살아 있는 예배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감명 깊던 유적이 새롭게 단장되면서 그 맛을 잃어가고 있다. […] 그런데다가 경관에 어울리지 않게 크게만 지은 대웅전이나 지장전과 어떤 신도가 세웠는지 절 입구 석불군 옆의 희고 멀쑥한 화강암 석탑과 석등 또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둘러친 철재 보호망 등은 운주사 유적이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로운 분위기를 깨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 이태호 외, 1994년 출판된 “운주사”(대원사)에서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증인이 있다. “삶을 위한 생산의 터전과 신앙, 종교적 조형물이 자연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생활 속에 살아 있는 예배 공간”이었던 시절에 천불천탑의 천불동으로 빠져들었던 외국인, 요헨 힐트만, 독일 조각가, 조각에서 한계를 느끼고 예술철학과 사진영상으로 기울었던 예술가. 운주사 천년의 역사 속에서 노동과 예술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을 잡아 그림이나 영상으로 남긴 자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은 의아하다못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요헨 힐트만의 사진은 “세계의 가장자리에 은밀히 숨어 있는 한 작은 자락”을 꿈꾸고 있다. 노동과 예술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되는 신화를 만산계곡에서 실시간으로 목격하면서 그는 자신의 전생을 되뇔 수밖에 없었겠다.
힐트만이 가진 예술철학이 천년의 세월 속에서 그저 한순간 풍미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여 그 홀로 그런 순간을 잡은 것일까. 아니면 돌틈에서 빛이 새나오듯 어느 한 순간만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사라지는 만물의 존재양식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의 예술철학이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순간을 점하고 있는 것이어서 그렇든, 아니면 만산계곡의 비의가 어느 한 순간 찰나적으로 드러나서 그렇든, 어찌하든 그의 사진이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그 순간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목격할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순간을 잡은 사진들은 메시지가 분명하여 감상자에게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석불이나 석탑을 나무와 숲의 그늘 속에 혹은 마른 나뭇가지 틈새에 안치해 놓고 부시시 드러내는 다른 부류의 사진이 더욱 감동적이다. “천불동은 나를 감동시킨다. 현대의 어떤 예술작품도 그만큼 나를 감동시키지는 못했다.”(요헨 힐트만)
그는 왜 하필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는 한국에서, 그것도 은밀히 숨어 있는 한미한 땅에서 그런 감동을 맛보았던 것일까? 그런 감동은 그로 하여금 혹 전생이 있어 자신이 한국의 수행승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그는 이곳에서 무슨 꿈을 꾼 것일까? 아니, 오히려 전생의 수행승이 현세의 그가 되어 그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어느 한 공간에 접어들 때 근원적인 일체감을 느끼며 시간감각을 잃어버리는 체험은 위대한 예술가, 문학가의 몫이다. 그런 체험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삼매요,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시적 체험이다. 왜 그런 체험들이 인간에게 불현듯 다가오는 것일까.
유럽의 68세대인 그는 만산계곡의 천불천탑을 황석영의 문학적 장치를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의 책 제목 “미륵”과 부제 “운주사 천불천탑의 용화세계”는 이를 잘 말해준다. 이러한 관점은 학계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 게다. 그러나 만산계곡의 주인들인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이러한 관점마저 넉넉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 천불천탑을 세운 석공들의 마음이 먼 훗날의 예술가를 끌어들여 그런 식으로 자신을 해석하도록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직접적인 소통이 있어 인간은 위대한 것이고 영원에 가까운 시간도 찰나에 넘어서는 것이다.
만산계곡에는 몸체를 잃고 풀밭에 나뒹구는 불두들이 있다. 이 불두들을 거두어 전시하지 않고 쓰러진 그 자리에 그대로 둔 마음들에 깨달음 있으라.
이러한 예술가들의 시적 체험에 걸맞게, 운주사에는 쓰러진 불두들이 있다. 혁명을 꿈꾸었던 자들의 좌절 덩어리처럼, 그들의 몸처럼 풀밭에 뒹글고 있다. 석불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운주사요, 석불을 이렇게까지 놔둔 곳이 운주사이다. 운주사 사찰의 개발이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손치더라도, 이렇게 불두들을 쓰러진 그 자리에 그대로 둔 수행승의 마음에만큼은 존경을 표하고 싶다.
시대의 상처니 혁명이니 좌절이니 운운하며 나는 해서는 안될 말들을 하고 있다. 일상을 편안하게 지내는 자의 입으로 그 어마어마한 것들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나같은 사람의 입으로는 그러한 것들을 기리고 추념하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오월의 싱그런 풀밭에서 나뒹구는 불두들을 보며 아픔 약간을 마음에 새길 수 있을 정도만 나에게 허락하고 싶다.
이곳을 드나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학적 장치와 예술적 장치를 가지고 이곳을 드나들겠고, 바로 그들이 그들의 언어를 가지고 이곳을 주로 말한다. 의아하면서도 당연하게도, 수행자들 역시 이곳을 드나들겠지만 애써 이곳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에 익숙하지 않으며, 언어로 물들거나 물들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수행자들은 이곳을 들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운주사雲住寺, 구름이 머무는 절집. 구름처럼 물처럼 떠나니는 운수납자들이 구름이 되어 잠시 머무르는 곳일까. 이제까지 나는 절집에 드나들면서도 절집을 짓고 가꾸었던 수행자들, 불화를 그리고 단청을 하고 조각을 하였던 수행자들, 바로 그들의 마음을 거의 헤아려보지 못하였다. 불교에 대하여 이제 조금 알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마음으로 절집을 보고 그들의 마음으로 석물을 보고 싶은 갈망이 비로소 생겨났다.
공사바위에 오르기 직전 볼 수 있는 석불.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거리면 석불의 몸에 그려진 그림자도 살랑거린다. 어느 한 수행자가 숲으로 들어가 좌선하고 있고, 그리하여 숲은 빛나고 있다.
운주사에는 각 석불군마다 주존불로 보이는 석불들이 있다. 그 석불들은 대개 좌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제까지 들른 대부분의 절집에서는 전각에 모신 불상들만을 보아왔으나, 운주사만큼은 석불들을 야외에 모시고 있다. 숲으로 들어간 수행자처럼, 한 그루 나무 아래 좌선하는 수행자처럼, 그렇게 석불은 수행하고 있다. 전각 안의 금불은 감동을 주지 못해도 이 석불은 무한한 감동을 준다.
이것은 석불이라기보다는 은둔 속에 참선하는 수행자의 모습만 같다. 바람이 불면 그의 몸에 닿은 나뭇잎 그림자가 살랑거리고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빛살이 아롱아롱 한다. 암벽을 지붕 삼고 그림자와 빛을 발로 삼고 암반을 자리 삼고, 그렇게 수행하고 있다. 이 한 명의 수행자가 있어 퇴적암 암벽이 웅대해지고 숲이 빛나고 있다.
석불을 조성한 수행자 혹은 석공이 그러했든, 아니면 후대의 수행자들이 그러했듯, 아니면 어느 농부들이 그러했든, 만산계곡에서는 좌선하는 석불, 서 있는 석불, 동자승같은 석불 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꼭 일가족 같기만 하다. 속세의 일신을 여의고 수행하는 수행자들의 고독을 알고서 그렇게 모아놓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커다란 석불의 위엄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동자승같은 석불을 탁마한 수행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수행자는 다음 생에 태어날 때에는 어려서부터 수행하는 수행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선승들 중에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독실한 불자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참선을 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는 분들도 있다. 수행에 무슨 비밀 무슨 염원이 있기에 이생과 내생까지 이어 비원하는 것일까.
뭔가에 홀린 채 만산계곡을 헤집고 다니면서 나는 이곳저곳 숲속, 암벽 아래, 나무 아래, 그늘 아래 좌선하는 수행자들을 본다. 천의 수행자들이 숲 여기저기 흩어져 수행하고 있고 천의 탑이 그들을 기리고 있다. 천의 수행자, 천의 탑이 인간의 수행을 장엄하고 있다. 때로는 입불로 때로는 좌불로 때로는 와불로 인간의 위대한 내면을 장엄하는 천불동 계곡은 원시불교의 원림정사처럼 느껴진다.
수백 수천의 비구들이 숲 이곳저곳에 흩어져 수행을 하던 곳, 아침이면 가사를 걸치고 발우를 들고 마을로 내려가 밥을 빌어먹은 뒤 되돌아와 발우와 가사를 제자리에 되돌려놓고 좌선하던 곳, 그늘 아래, 나무 아래, 암벽 아래, 숲속. 혹 이곳이 원시불교의 공간은 아니었을까? 원시불교의 근본정신을 천의 석상, 천의 석탑으로 형상화한 것은 아니었을까? 구름이 머무는 절집, 운주사, 이곳에서 나는, 숲으로 되돌아와 몸을 곧게 세우거나 몸을 누이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입선, 와선, 좌선하는 수행자들을 본다. 천의 자세로, 천의 얼굴로, 천의 수인으로, 천의 일심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본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물들지 않는 마음이 곧 악하지 않는 마음이다. 관념에 물들지 않고 감각에 물들지 않는 마음, 비유로 말하자면, 구름으로 가려지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을 얻기까지 운수납자들이 구름이 머물고 있는 만산계곡 이곳저곳에 흩어져 수행하고 있다.
나뭇잎 그림자가 수행자의 몸을 살랑살랑 긋고 있으되 그 그림자에 끌려가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처럼, 그늘지지 않는 마음처럼, 그렇게. 구름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으되 구름의 그림자에 속박되지 않는 마음처럼, 그렇게.
암벽에 어슷 기대고 눈을 감은 석불. 서양조각가 브랑쿠시는 삼천 여년 전의 고대 희랍의 유물에서 영감을 얻었다는데, 이 석불에서 영감을 얻은 예술가는 없었을까.
운주사의 석불들은 감동을 자아낸다. 감동이 지나친 나머지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여느 예술작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어쩐 일인가? 촌스럽고 어린아이의 솜씨같은 조형이 어찌 이렇게 감동적일 수 있는가? 한 마디로 경이롭다. 이것이 경이로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경이롭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격정으로 타오르고, 노여움으로 타오르고, 미망으로 타오르고, 고통과 슬픔으로 타오르는 중생심의 내가, 타오르는 불을 꺼뜨리고 조용히 앉아 있거나 도포자락 속으로 손을 감추고 다소곳이 서 있거나 편안히 눈을 감은 수행자의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누가 이런 꿈을 꾸어 이런 석불들을 남겨놓았을까. 이런 석불들을 남겨놓은 수백 년 전의 누군가가 현재의 내 마음을 빌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내가 되어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 허튼소리 같겠지만, 아서라, 관념에 물들어 있고 욕망에 물들어 있고 허망한 것에 물들어 있고 고통과 슬픔에 물들어 있는 나는 사실은 내가 아니다. 그 관념, 그 욕망, 그 허망한 것, 그 고통과 그 슬픔이 내가 되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꿈의 물질과도 같다. “인간은 꿈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셰익스피어)
나는 누구의 무엇의 꿈이 실현된 물질인가? 천불동의 석불 하나하나가 내게 감동을 주고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을진대, 부디, 내 몸과 마음이 관념과 욕망과 고통의 희생물이 되지 말고, 천불천탑을 탁마한 수행자가 내 몸과 마음을 빌어 여전히 꿈꿀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의 꿈입니까? ― 만산계곡을 돌아다니며 이 물음을 던져 보았지만 숲은 신비에 휩싸인 채 내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수백 년 전 숲속으로 들어간 누군가가 비로소 내가 되어 꿈을 꾸기 시작한 탓인지 글을 쓰는 지금까지 아직도 나는 운주사의 경이로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