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法들은 意가 앞서가는 것,
意가 선두인 것, 意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만약 탁한 意로
말하거나 행하면
그로 인하여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수레꾼의 발걸음[1]“수레꾼”으로 번역한 “vahanto”는 ‘vahati(짐을 지다, 나르다, 운반하다)’의 현재분사형으로서, 원뜻은 ‘운반하는 자, 운반하는 것’, 즉 ‘수레꾼’이나 ‘소’, ‘말’, ‘수레’를 모두 가리킬 수 있다. 그래서 “vahato padaṃ”를 “수레꾼의 발걸음”으로 읽는 대신, 다른 수레들이 앞서 지나가면서 생긴 “수레자국”으로 읽기도 한다. 이 해석은 ‘수레(vāha)’라는 별도의 낱말이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vahanto”를 ‘수레’로 번역하게 되면 ‘意’가 ‘法들’보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먼저 간 것으로 해석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法들은 意가 앞서가는 것”이라 함은, 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意와 法들이 동시에 나아가되 다만 그 선두에 意가 있다는 의미로 보고 싶다. 마치 수레꾼의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수레바퀴가 굴러가듯이, 수레꾼의 발걸음(“意”)과 수레바퀴(“法들”)는 동시에 나아가되 다만 그 선두에 수레꾼이 있는 이치와도 같다. 그래야 “법들은 意로 이루어지는 것”(수레바퀴의 구름은 수레꾼의 발걸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더 강력해진다. 법구경 제2송의 “그림자가 그를 떠나지 않는다”는 경문 역시 “그”와 “그림자” 간에 시간 간격이 없이 동시적임을 말해 준다. “그와 그림자”, “수레꾼의 발걸음과 수레바퀴”는 모두 “意와 法들”에 대한 유비인 것이다. 증지부(A i.10)에도 ‘불선법이든 선법이든 모든 법은 意가 앞서가는 것이다. 意가 그 법들의 첫째로 나타나고 바로 뒤에 그 법들이 나타난다’는 취지의 경문이 보이는데, “그 법들의 첫째로(tesaṃ dhammānaṃ paṭhamaṃ)”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을 따르듯이.2法들은 意가 앞서가는 것,
意가 선두인 것, 意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만약 맑은 意로
말하거나 행하면
그로 인하여 안락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를 떠나지 않듯이.3‘그가 나를 욕했다’, ‘그가 나를 쳤다’,
‘그가 나의 것을 빼앗았다’ ―
이것에 얽매어 있는 자들,
그들에게서 증오는 그치지 않는다.4‘그가 나를 욕했다’, ‘그가 나를 쳤다’,
‘그가 나의 것을 빼앗았다’ ―
이것에 얽매어 있지 않은 자들,
그들에게서 증오는 그친다.5참으로 증오가 증오에 의해
그치는 일 결코 없으며
오히려 증오 없음에 의해 그치나니 ―
이것은 만고의 법이어라.6남들은 ‘우리가 떠나 있는 곳’,
그곳을 분별하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그곳을 분별하는 자들은
분별이 있기에 싸움이 그친다.[2]“그가 나를 욕했다”(제3송)에서 “싸움이 그친다”(제6송) 까지의 게송은, 중부 제128경(M iii.153) 사구게 십송十頌 중에서 뽑은 “법구法句”이다. 코삼비 비구들이 부처님께서 경책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다툼과 쟁론을 계속하자, 부처님께서 그들 비구들을 떠나시면서 송하신 것이다.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이, 마치 코끼리가 자유롭게 숲을 노닐듯이, 혼자서 가라!”(법구경 제329송)는 게송 역시 그 십송의 일부이다. 이로써 법구경은 여러 경에서 “법구法句”를 뽑아 핵심어를 중심으로 결집한 것임을 알 수 있다.7‘아름다움’[3]“아름다움(subha)”은 주로 “부정不淨, 추함, 더러움(asubha)”에 대립하는 의미로 쓰인다. 몸에 대해 ‘아름답지 않음을 관찰’하는 것을 두고 “부정관不淨觀”이라 하므로, 이 게송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의 관찰”이라 함은 몸에 대해 “아름답다”고 보는 것, 더 깊이 들어가서는 “아름다움의 相(subhanimitta)”에 바르지 않게 유의(非如理作意)하는 것으로 보고 싶다. “아름다움의 相”에 바르지 않게 유의하면 감관들에 대해 수호하지 못하며, 거기에서 욕락에 대한 욕구(kāmacchanda)가 일어나 증식한다. 그렇게 해서 마라에게 정복당하고 만다.을 관찰하는 가운데
감관感官들에 대해 수호하지 못하는 자,
음식의 적정량을 모르고
나태하고 정진이 열악한 자 ―
그는 마라가 정복하고 만다,
바람이 약한 나무를 정복하듯이.8‘아름답지 않음’을 관찰하는 가운데
감관들에 대해 잘 수호하는 자,
음식의 적정량을 알고
신심이 있고 정진이 굳건한 자 ―
그는 마라가 정복하지 못한다,
바람이 바위산을 정복하지 못하듯이.9오탁汚濁을 떠나지 못한 자가
황색 가사袈裟를 두를지라도
그는 조복調伏과 진실을 떠난 자,
가사를 두를 자격 없어라!10그러나 오탁을 버린 자가
계戒들 안에서 잘 입정入定하면
그는 조복과 진실을 갖춘 자,
가사를 두를 자격 있어라!11‘實 없는 것’을 두고 ‘實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
‘實 있는 것’을 두고 ‘實 없는 것’을 보는 자들 ―
그들은 ‘實 있는 것’에 다가가지 않나니,
그들의 행처行處는 그릇된 사유(邪思惟)이어라!12‘實 있는 것’을 ‘實 있는 것’으로 알고
‘實 없는 것’을 ‘實 없는 것’으로 아는 자들 ―
그들은 ‘實 있는 것’에 다가가나니,
그들의 행처는 바른 사유(正思惟)이어라!13지붕을 잘 이지 못한 집은
빗물이 새어들듯이,
계발되지 못한 心은
貪이 새어든다.14지붕을 잘 이은 집은
빗물이 새어들지 않듯이,
잘 계발된 心은
貪이 새어들지 못한다.15여기에서도 슬퍼하고 떠나서도[4]“떠나서”로 번역한 “pecca”는 일반적으로 “죽어서”로 해석된다. 슬퍼하고
두 곳에서 모두 슬퍼한다, 악행하는 자는!
그는 자신의 행위의 오염을 알고서
슬퍼하고 또 타격을 입는다.16여기에서도 기뻐하고 떠나서도 기뻐하고
두 곳에서 모두 기뻐한다, 공덕을 지은 자는!
그는 자신의 행위의 청정을 알고서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17여기에서도 소진되고 떠나서도 소진되고
두 곳에서 모두 소진된다, 악행하는 자는!
그는 ‘내가 지은 악행이 있다’며 소진되고
악처惡處에 가서는 더욱 소진된다.18여기에서도 환희하고 떠나서도 환희하고
두 곳에서 모두 환희한다, 공덕을 지은 자는!
그는 ‘내가 지은 공덕이 있다’며 환희하고
선처善處에 가서는 더욱 환희한다.19비록 많은 게송집偈頌集[5]‘모아놓은 게송’, ‘결집한 게송’을 두고 “결집된 것(sahita)”, 즉 “게송집”이라 한다. 베다 전통에서 결집하여 전승된 베다 게송을 두고 “본집本集(saṃhita)”이라 하듯, 불문佛門에서는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일러주신 가르침들을 결집하여 “게송집”이라는 이름으로 유통했을 것이다. “(베다 전승의) 본집”과 “(佛門의) 게송집”은 번역어로는 다르지만 인도 고대어로는 같다.을 말할지라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고 방일한 사람이라면,
마치 소치는 자가 남의 소들을 세는 것과 같아서
그는 사문沙門의 일원이 아니다.20비록 적은 게송집을 말할지라도
법에 이르도록 여법하게 실행하는 자[6]“법에 이르도록 여법하게 실행하는 자(dhamassa anudhammacārī)”에 대한 명확한 경전적 정의는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가르침(법)을 따라 행하는 자’라고 해석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수습차제 중에 이르러야 할 법에 이르기 위해 “여법如法하게” 걸어 마침내 “법”에 이르는 것, 즉 ‘법에 이르기 위해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으로 읽고 싶다. “여법하게”로 번역한 “anudhamma”라는 용어는 장부 제18경(D ii.214)의 “성자의 법을 듣고 바르게 유의하여 법에 이르도록 여법하게 걷는다(ariyadhammaṃ suṇāti, yoniso manasi karoti, dhammānudhammaṃ paṭipajjati)”는 경문에서처럼 “걷다(paṭipajjati)”는 동사와 결합되거나, 장부 제16경(D ii.104)에서처럼 “실행하다, 실천하다(carati)”는 동사어근과 결합되어 쓰인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anudhamma”는 복합어의 한 요소로 쓰이거나 단독으로는 “anudhammaṃ”이라는 불변사로 쓰인 듯하다. 숫타니파타 제510송의 “순서대로 여법하게 제게 답해 주소서(anupubbaṃ anudhammaṃ byākarohi me)라는 게송은 불변사의 용례로 보이며, 이 법구경 제20송의 “법에 이르도록 여법하게 실행하는 자(dhamassa anudhammacārī)”는 복합어 요소의 용례로 보인다.라면,
탐貪과 진瞋과 치痴를 버리고서
바르게 꿰뚫어 아는 자, 心이 잘 해탈된 자라면,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취착(取)하지 않는 자이니
그는 사문의 일원이다.1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duṭṭhena bhāsatī vā karoti vā
tato naṃ dukkham anveti cakkaṃ va vahato padaṃ.2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sannena bhāsatī vā karoti vā
tato naṃ sukham anveti chāyā va anapāyinī.3“akkocchi maṃ avadhi maṃ ajini maṃ ahāsi me”,
ye taṃ upanayhanti veraṃ tesaṃ na sammati.4“akkocchi maṃ avadhi maṃ ajini maṃ ahāsi me”,
ye taṃ na upanayhanti veraṃ tes’ ūpasammati.5na hi verena verāni sammant’ idha kudācana
averena ca sammanti, esa dhammo sanantano.6pare ca na vijānanti mayam ettha yamhāmase,
ye ca tattha vijānanti tato sammanti medhagā.7subhānupassiṃ viharantaṃ indriyesu asaṃvutaṃ
bhojanamhi cāmattaññuṃ kusītaṃ hīnavīriyaṃ
taṃ ve pasahatī Māro vāto rukkhaṃ va dubbalaṃ.8asubhānupassiṃ viharantaṃ indriyesu susaṃvutaṃ
bhojanamhi ca mattaññuṃ saddhaṃ āraddhavīriyaṃ
taṃ ve na-ppasahatī Māro vāto selaṃ va pabbataṃ.9anikkasāvo kāsāvaṃ yo vatthaṃ paridahessati
apeto damasaccena na so kāsāvam arahati.10yo ca vantakasāv’ assa sīlesu susamāhito
upeto damasaccena sa ve kāsāvam arahati.11asāre sāramatino sāre cāsāradassino
te sāraṃ nādhigacchanti micchāsaṃkappagocarā.12sārañ ca sārato ñatvā asārañ ca asārato
te sāraṃ adhigacchanti sammāsaṃkappagocarā.13yathā agāraṃ ducchannaṃ vuṭṭhi samativijjhati
evaṃ abhāvitaṃ cittaṃ rāgo samativijjhati.14yathā agāraṃ succhannaṃ vuṭṭhi na samativijjhati
evaṃ subhāvitaṃ cittaṃ rāgo na samativijjhati.15idha socati pecca socati pāpakārī ubhayattha socati,
so socati so vihaññati disvā kammakiliṭṭham attano.16idha modati pecca modati katapuñño ubhayattha modati,
so modati so pamodati disvā kammavisuddhim attano.17idha tappati pecca tappati pāpakārī ubhayattha tappati,
“pāpaṃ me katan” ti tappati. bhiyyo tappati duggatiṃ gato.18idha nandati pecca nandati katapuñño ubhayattha nandati,
“puññaṃ me katan” ti nandati. bhiyyo nandati suggatiṃ gato.19bahum pi ce sahitaṃ bhāsamāno na takkaro hoti naro pamatto
gopo va gāvo gaṇayaṃ paresaṃ na bhāgavā sāmaññassa hoti.20appam pi ce sahitaṃ bhāsamāno dhammassa hoti anudhammacārī
rāgañ ca dosañ ca pahāya mohaṃ sammappajāno suvimuttacitto
anupādiyāno idha vā huraṃ vā sa bhāgavā sāmaññassa hoti.
* 각주
1. | ↑ | “수레꾼”으로 번역한 “vahanto”는 ‘vahati(짐을 지다, 나르다, 운반하다)’의 현재분사형으로서, 원뜻은 ‘운반하는 자, 운반하는 것’, 즉 ‘수레꾼’이나 ‘소’, ‘말’, ‘수레’를 모두 가리킬 수 있다. 그래서 “vahato padaṃ”를 “수레꾼의 발걸음”으로 읽는 대신, 다른 수레들이 앞서 지나가면서 생긴 “수레자국”으로 읽기도 한다. 이 해석은 ‘수레(vāha)’라는 별도의 낱말이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vahanto”를 ‘수레’로 번역하게 되면 ‘意’가 ‘法들’보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먼저 간 것으로 해석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法들은 意가 앞서가는 것”이라 함은, 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意와 法들이 동시에 나아가되 다만 그 선두에 意가 있다는 의미로 보고 싶다. 마치 수레꾼의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수레바퀴가 굴러가듯이, 수레꾼의 발걸음(“意”)과 수레바퀴(“法들”)는 동시에 나아가되 다만 그 선두에 수레꾼이 있는 이치와도 같다. 그래야 “법들은 意로 이루어지는 것”(수레바퀴의 구름은 수레꾼의 발걸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더 강력해진다. 법구경 제2송의 “그림자가 그를 떠나지 않는다”는 경문 역시 “그”와 “그림자” 간에 시간 간격이 없이 동시적임을 말해 준다. “그와 그림자”, “수레꾼의 발걸음과 수레바퀴”는 모두 “意와 法들”에 대한 유비인 것이다. 증지부(A i.10)에도 ‘불선법이든 선법이든 모든 법은 意가 앞서가는 것이다. 意가 그 법들의 첫째로 나타나고 바로 뒤에 그 법들이 나타난다’는 취지의 경문이 보이는데, “그 법들의 첫째로(tesaṃ dhammānaṃ paṭhamaṃ)”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
2. | ↑ | “그가 나를 욕했다”(제3송)에서 “싸움이 그친다”(제6송) 까지의 게송은, 중부 제128경(M iii.153) 사구게 십송十頌 중에서 뽑은 “법구法句”이다. 코삼비 비구들이 부처님께서 경책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다툼과 쟁론을 계속하자, 부처님께서 그들 비구들을 떠나시면서 송하신 것이다.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이, 마치 코끼리가 자유롭게 숲을 노닐듯이, 혼자서 가라!”(법구경 제329송)는 게송 역시 그 십송의 일부이다. 이로써 법구경은 여러 경에서 “법구法句”를 뽑아 핵심어를 중심으로 결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3. | ↑ | “아름다움(subha)”은 주로 “부정不淨, 추함, 더러움(asubha)”에 대립하는 의미로 쓰인다. 몸에 대해 ‘아름답지 않음을 관찰’하는 것을 두고 “부정관不淨觀”이라 하므로, 이 게송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의 관찰”이라 함은 몸에 대해 “아름답다”고 보는 것, 더 깊이 들어가서는 “아름다움의 相(subhanimitta)”에 바르지 않게 유의(非如理作意)하는 것으로 보고 싶다. “아름다움의 相”에 바르지 않게 유의하면 감관들에 대해 수호하지 못하며, 거기에서 욕락에 대한 욕구(kāmacchanda)가 일어나 증식한다. 그렇게 해서 마라에게 정복당하고 만다. |
4. | ↑ | “떠나서”로 번역한 “pecca”는 일반적으로 “죽어서”로 해석된다. |
5. | ↑ | ‘모아놓은 게송’, ‘결집한 게송’을 두고 “결집된 것(sahita)”, 즉 “게송집”이라 한다. 베다 전통에서 결집하여 전승된 베다 게송을 두고 “본집本集(saṃhita)”이라 하듯, 불문佛門에서는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일러주신 가르침들을 결집하여 “게송집”이라는 이름으로 유통했을 것이다. “(베다 전승의) 본집”과 “(佛門의) 게송집”은 번역어로는 다르지만 인도 고대어로는 같다. |
6. | ↑ | “법에 이르도록 여법하게 실행하는 자(dhamassa anudhammacārī)”에 대한 명확한 경전적 정의는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가르침(법)을 따라 행하는 자’라고 해석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수습차제 중에 이르러야 할 법에 이르기 위해 “여법如法하게” 걸어 마침내 “법”에 이르는 것, 즉 ‘법에 이르기 위해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으로 읽고 싶다. “여법하게”로 번역한 “anudhamma”라는 용어는 장부 제18경(D ii.214)의 “성자의 법을 듣고 바르게 유의하여 법에 이르도록 여법하게 걷는다(ariyadhammaṃ suṇāti, yoniso manasi karoti, dhammānudhammaṃ paṭipajjati)”는 경문에서처럼 “걷다(paṭipajjati)”는 동사와 결합되거나, 장부 제16경(D ii.104)에서처럼 “실행하다, 실천하다(carati)”는 동사어근과 결합되어 쓰인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anudhamma”는 복합어의 한 요소로 쓰이거나 단독으로는 “anudhammaṃ”이라는 불변사로 쓰인 듯하다. 숫타니파타 제510송의 “순서대로 여법하게 제게 답해 주소서(anupubbaṃ anudhammaṃ byākarohi me)라는 게송은 불변사의 용례로 보이며, 이 법구경 제20송의 “법에 이르도록 여법하게 실행하는 자(dhamassa anudhammacārī)”는 복합어 요소의 용례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