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바히야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보임에는 다만 보임만 있을 뿐, 들림에는 다만 들림만 있을 뿐, 지각됨에는 다만 지각됨만 있을 뿐, 식별됨에는 다만 식별됨만 있을 뿐’이라고.
진실로 바히야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보임에는 다만 보임만 있을 뿐, 들림에는 다만 들림만 있을 뿐, 지각됨에는 다만 지각됨만 있을 뿐, 식별됨에는 다만 식별됨만 있을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며,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곳에 있지 않으며, 바히야여 그대는 그곳에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라고.
tasmātiha te, bāhiya, evaṃ sikkhitabbaṃ —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ī’ti. evañhi te, bāhiya, sikkhitabbaṃ. yato kho te, bāhiya,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i, tato tvaṃ, bāhiya, na tena; yato tvaṃ, bāhiya, na tena tato tvaṃ, bāhiya, na tattha; yato tvaṃ, bāhiya, na tattha, tato tvaṃ, bāhiya,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 «자설경自說經», “바히야경”(Udana 1.10)에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식별하는 네 가지를 일컬어 견문각지見聞覺知라 한다. 견문각지가 이루어질 때 다만 견문각지만 있을 뿐, ‘나’라는 것은 그 견문각지와 함께 있지 않으며, ‘나’라는 것은 그 견문각지 속에 있지 않으며, 따라서 ‘나’라는 것은 견문각지 이편에도 견문각지 저편에도 그 중간에도 있지 않다. — 이렇게 배우고 익히라는 것이 바히야에게 이르신 부처님의 설법이다.
오늘날 배움이라는 것은 대개 정보의 습득과 이해의 차원으로 간주되지만, 고대세계에서 배움이라는 것은 들은 것을 스스로의 호흡 속에서 확인하고 깨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견문각지에는 다만 견문각지만 있을 뿐”임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 글을 보고 읽고 분별하는 실시간의 견문각지 속에서 확인하고 깨치는 것이지, 지금 여기를 떠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를 떠난 배움은 세간적인 배움이지 학인의 배움이 아니다. 불법佛法은 때를 기다려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바히야여 견문각지에는 다만 견문각지만 있을 뿐이니라! 바히야여 그대는 견문각지와 함께 있지 않으며, 바히야여 그대는 견문각지 속에 있지 않으며, 바히야여 그대는 견문각지 이편에도 저편에도 그 중간에도 있지 않다” — 이 설법이 부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실시간으로 바히야에게서 속속들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바히야가 이 간략한 교법을 듣고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하였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