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공부”라는 역설적 부제가 붙은 정상교의 「도쿄대학 불교학과」(동아시아 2014)는, 1970년대에 태어난 세대가 어떻게 불교를 접하며 성장했으며, 어떻게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는가 하는 개인적 여정을 토대로 불교사의 주요 장면과 사상을 서술한 책이다. 책 표지 소개문에 따르면, “인도 불교, 티베트 불교, 소승 남방불교, 중국의 선불교, 그리고 한국 불교까지” 포괄적으로 다루었다고 하지만, 초기불교는 상대적으로 거의 다루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며, 인도의 중관·유식 이후 전개된 불교를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지나가는 김에 언급해 두자면, 저자는 “소승 남방불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표지 소개문은 출판사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리고 저자는 불교학을 공부하는 학인인 만큼 현대불교학의 태동과 동향, 현대불교사까지 포함한 다채로운 내용으로 정말 소설보다 재미있게 불교를 소개했다.
최근에 출간된 정상교의 「도쿄대학 불교학과」(동아시아 2014)는, 불교에 문외한이었다가 삼십대에 비로소 불교를 처음 공부한 젊은 세대의 공부여정을 담고 있다.
부처님 열반 후 경전 결집, 나가르주나, 구마라집(반야·중관), 선불교, 현장(유식), 카밀라실라(티베트), 한국불교, 서양불교학, 일본불교학, 그리고 정상교, 사촌형, 금강대학교, 도쿄대학 불교학과. 이것이 이 책의 서사구조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정상교라는 젊은이가 흔한 수준의 불교정보만 풍월처럼 접했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불교학에 빠지고, 이후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를 공부하면서 불교가 인도에서 태동하여 실크로드를 가로질러 여기 이 땅에 이르기까지의 장엄한 여정을 발견한 과정을, 마치 소설처럼 구성하여 개인사와 긴밀하게 연계시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여기 있는 이 한 사람,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이 한 사람에게서 새롭게 펼쳐지는 것…. 그래서 정상교의 불교 소개는 어렵고 건조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며, 그 정보 구성도 치밀하여 허술하지가 않으며, 개인사가 함께 흘러가면서 감동적이다.
특히 류시화 번역의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한 평이라든가 강신주의 「중론」 인용에 대한 평, 즉 “1차 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수준 낮은 서적들”(298)에 대한 평을 접하며, 오랜만에 속이 시원했다. 저자가 원만한 감성과 구도자적인 진지한 자세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의 책에 대하여 유독 신랄한 평가를 내린 것은,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 경론을 면밀히 독해하는 문헌학자적 자세 때문일 것이다. 고전어의 세계에 들어서면 일상적인 해석체계를 파괴하는 여정을 밟게 마련이며, 그 여정에 들어선 자로서 고전어 텍스트에 대한 피상적인 소개글을 접하노라면, 히말라야와 같은 설산들이 속악한 풍경으로 채색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된다. 이는 고래로부터 모든 선각들의 고민거리였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겠지만, 가끔씩은 이런 신랄한 평을 내리는 안목들이 그립기는 하다.
저자의 이력이 이채롭다. 삼십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에는 거의 문외한이었다가, 대학 재학생 모두에게 4년 장학금에다 유학비용까지 대준다는 한 불교대학의 광고를 접하고 늦깎이로 다시 수능시험을 치루고 불교대학에 입학, 졸업후 도쿄대학 불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현재 인도-티베트 불교를 공부중이다. 일본 불교학은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만큼, 그 공간에서 공부하는 방식이나 현대 불교문헌학에 대한 소개도 흥미롭다.
도쿄대학 불교학과 대학원생들의 학습풍경을 한 번 들여다보자. 갓 합격한 대학원 예비입학생도 선후배들 간에 함께하는 산스크리트어 경론 독해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예비입학생 정상교가 독해를 한다. 그러면 선배가 그 내용을 듣고, “연기”라는 낱말이 무엇인지 묻는다. “연기”라는 산스크리트어의 낱말분석과 초기경전 용례 등등을 꼬치꼬치 묻는다. 그러면 후배는 그 자리에서 답해야 한다. 자신은 왜 “연기”라고 번역했는지 분명하게 그 근거를 대야 한다. 모르면 그 자리에서 사전과 문법서라도 참고하여 답해야 한다. 그 답을 하기까지 선배들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 이건 뭐 취조가 따로 없을 정도이지만, 공부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공부 분위기가 부럽다. 아, 내가 저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나 역시 삼십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에 완벽한 문외한이었다가 삼십대 중반에 비로소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으며, 저자 정상교와 거의 같은 세대다. 물론 나는 철저히 독학으로 불교를 공부하고 있으나 그가 책 끝에 소개해놓은 서적들도 대부분 읽었던 것들이며, 특히나 후기중관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다르마키르티의 불교인식론 소개까지 있어서 반가웠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중관과 유식을 소화해내지 못한다면 초기불교의 십이연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저자와 같은 중관과 유식 전공자들이 그 어떤 대하드라마보다도 훨씬 장쾌한 불교 서래사(西來史)을 가슴에 품으며 그 일급의 사상을 현대적 서술로 풀어낼 날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내 꿈이기도 하지만, 보다시피 일상인인 나에게 그것은 그저 꿈에 불과할 뿐이므로.
마지막 장에서는 나가르주나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한다. 특히 저자는 나가르주나의 생애를 문학적으로 재구하여 소개해놓고 있는데, 그 솜씨가 만만찮다. 다르마키르티의 사상을 소개한 타니 타다시의 「무상의 철학」을 읽어보면 그 문학적 감수성이 과다하여 감성 취향의 소설처럼 읽기가 거북하다. 수행중에 조금이라도 체득한 바가 있다면 반드시 그런 수준의 감수성은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는데도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교 경론의 독해에 취약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에 비하자면, 정상교의 감수성은 그런 수준을 넘어서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번역어 성립을 두고 “소리를 살펴보다”라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평했는데, 소위 “이치”라는 것도 하나의 감수성에 불과함을 유념해 주었으면 한다. 태고보우의 선시에도 “곡조를 본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역자들은 한결같이 “곡조를 듣는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과연 그게 옳은 번역일까? 선가에서 회자되는 육창일원(六窓一猿)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안이비설신의라는 육근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소리를 본다”는 표현은 뭔가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 경론을 해독할 때에는 이와 같은 심층을 염두에 두고 표현 하나하나에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접근해야 한다. 나는 대학원 시절에 서양고전문헌학을 공부하면서 소장학자들은 텍스트를 마음대로 다루는 경향이 심하고 노장학자들일수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에게 이해되지 않는다하더라도 최대한 텍스트를 수정하지 않고 그것이 이해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문헌학자에겐 바로 이와 같은 유장한 자세, 노년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물며 불교 경전을 다루는 학자에게랴!
저자는 불교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우연한 정보에 기반한 듯이 소개하나,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성장기에 겪은 욕망과 죽음의 문제를 풀 길이 없었으며 그 의문이 바로 이 불교학으로 이끌었음을. 불교는 바로 이런 의문을 가진 자에게 접근을 허락한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나 지적 허영으로 접근한다면 불교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유산에 불과할 것이며, 저자처럼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쇳덩어리와 같은 의문을 품고 접근한다면 불교는 무량·무수·무변의 장엄한 세계를 펼쳐보일 것이다. 수행법에 고착되어 불교공부를 협애화하는 이 시대에, 초기불교와 구사, 중관, 유식, 화엄, 선, 영화, 애니메이션, 현대문헌학을 아우르면서 불교를 ‘재미있게’ 소개한 소장학자의 건강과 성실과 진취를 기원한다.
더불어, 불교공부에 관심이 있으나 어떻게 접근할 지 몰라 애를 먹는 젊은 세대에게 이 책이 널리 읽히기를 기대해본다. 현각스님의 「만행」처럼 흡입력 있게 읽히면서도 그보다 무게감 있게 불교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에 관심 있는 분들이 「도쿄대학 불교학과」에 소개된 불교사와 사상을 자기 나름으로 구성하려면 숱한 불교서적을 찾아헤매며 읽어야 하지만, 이 책은 그 과정을 쉽고 간단하게 요약해 주는 장점도 있다. 물론 그런만큼 불교사상의 심층을 다루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이 책을 읽고난 이후 각자 밟아야 할 여정일 것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방식의 불교공부를 원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윗 세대는 기존 양태의 불교신행을 가슴 깊이 수용하고 있다. 이 간극에서 불교를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어느 한편을 집착하고 다른 편을 배척하는 방식은 성숙하지 못한 인생의 몫이다. 우리는 이 두 세대를 모두 배우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질문자의 공부역량과 근기에 따라 그에 맞게 예우하여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초기불교의 연기와 사성제, 반야, 중관, 유식, 화엄, 선에서 수승한 가르침을 회통하여 간파할 줄 아는 안목을 길러내야 한다.
어떤 것을 연하여, 비구여, 희론(戱論)-상(想)-의미(意味)가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거기에 즐길 것이, 주장할 것이, 집착할 것이 있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집착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증오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의심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아만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무명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손에 몽둥이를 쥐고 칼을 쥐고 다투고 겨루고 싸우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것의 끝이다. 여기에서 이들 나쁘고 해로운 상태들이 남김없이 그친다.
—「마두핀디카 숫타」에서
우리는 일견 상충되고 모순되는 듯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목도하면서, 옛 세대의 불교수용과 새 세대의 합리적 사고의 차이를 목도하면서,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희론-상-의미”에 집착하지 않은 채 그 차이를 부각시키거나 소멸시킬 줄 알아야 한다. 번뇌 속의 논리로 치밀하게 불교의 가르침을 구축하는 한, “손에 몽둥이를 쥐고 칼을 쥐고 다투고 겨루고 싸우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수행중 일어나는 체험에 취하여 그것을 붙잡고 그 시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취하는 한, 역시 “손에 몽둥이를 쥐고 칼을 쥐고 다투고 겨루고 싸우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희론-상-의미의 집착을 뿌리로 이루어지는 공부, 즉 생각의 내용물의 노예가 되어 이루어지는 공부이므로. 그것들은 다름아닌 무명과 아만과 의심과 증오와 집착이라는 칼숲에서 벌어지는 불교공부이므로.
천한 자란 누구인가?
불타는 탐욕으로 자신을 태우고
언제나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화를 내며
사람을 증오하고, 사악하며
겉으로만 꾸며서 사람을 속이고, 바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책략을 부리는 자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폭력에 호소하고, 알량한 육신의 영화를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리는 자
그를 우리는 천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인 것이 아니다.
태어남에 의해 브라만인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해 천민이고 행위에 의해 브라만인 것이다.(316)
우리는 불교공부를 하면서도 천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스스로를 살필 일이다. 저자처럼 가슴에 얹힌 의문을 풀기 위해 불교사를 장엄하게 탐색하는 여정에는 천한 자들의 탐욕과 화, 증오가 자리잡을 틈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스스로의 의문을 풀기 위해 불교를 공부할 일이다.
고싱가님!
반갑습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ㅋ!
초기불교와 대승, 선에 이르기 까지
모짜르트와 니체에 대한 이해에 까지
삶의 깊은 심연에 까지
늙은 진흙소의 물 위를 걷는 발거음 마냥
천천히, 천천히
저를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처님 오신날,
집안에 오신 부처님들과
환하고 평안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
반갑습니다 성해님!
안녕하세요? 가끔 들러 글 읽고 가는 사람입니다. 불교도가 아니면서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혼자 공부를 하기에 두서 없는 생각을 하고 체계 없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공부라 할 것도 없이 그저 혼자 책 읽고 글을 정리하는 정도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읽을 책(‘도쿄대학 불교학과‘는 오늘 주문했습니다.)에 대한 상세한 리뷰를 접하고 반가움과 설렘 같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고싱가님이 읽으신 책 가운데 저도 읽은 ’불교가 좋다‘에 대해 “경박한 의견들로 채워져 있어 경청할 만한 가치가 별로 없다.”는 글을 쓰신 것을 보며 마음 속으로 아, 불교 공부는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쉬운 것은 구체적으로 예를 든 설명이 부기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점입니다. 재작년과 작년 각각 한권씩 읽은 불교 책이 저로 하여금 근본적인 차원에 대해 궁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 권은 불교도가 쓴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이고 다른 한 권은 신학자가 쓴 ’붓다와 희생양‘이란 책입니다. 전자에서 저자는 “기존 불교계는 자동차는 엔진, 브레이크, 바퀴 등 즉 자동차 전체보다 작은 단위의 실체들이 일시적으로 만나 이루어진 것이기에 자동차라는 실체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문제는 자동차의 실체를 부정하기 위해 그 부품들의 실체는 인정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점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후자에서 저자는 르네 지라르의 논의에 의거해 카타르마, 파르마코스, 오이디푸스, 디오니소스, 제불(諸佛: 석가모니 붓다와 숱한 과거 불과 미래 불 등)을 모두 희생양들로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분신공양, 소신공양, 연비(燃臂) 의식 등을 요가 수행자 또는 출가 수행자들이 자신들의 몸속에 제의적으로 내면화되는 불 제사(祭祀)로 정의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만일 저자의 주장이 충분한 설득력과 진실에 바탕한 것이라면 왜 그런 점들이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참고 도서 목록의 존재는 저자의 논지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하지만 다수가 독일어 서적들인 참고 목록들이 단순 공개되는 데 그쳐 답답하다. 어떤 계기로 참고 서적의 저자들이 불교의 희생제의적 면모에 천착(穿鑿)하게 되었고 어떤 경로로 정보들을 취합했으며 저자들이 어떤 반응에 노출되었는지도 함께 실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는 글을 썼습니다.(혹시 참고가 될까 싶어 제가 쓴 리뷰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http://blog.aladin.co.kr/745224125/6362170) 불교의 근본에 대한 문제이고 자료를 다루는 문제이기도 해 평소 눈여겨 보아온 고싱가님께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르네 지라르 관련 책은 기억이 안날 정도로 오래 전에 읽었던 까닭에 제가 논쟁적으로 평할 입장이 아닙니다만, 그의 폭력과 희생양 구조로 불교를 독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더구나 정일권이 르네 지라르의 도식을 빌어 불교를 독해했다고 하지만 인용된 내용에 비추어보더라도 지극히 표피적인 해석이지요. 추천인물들인 강영안, 손봉호, 이경직, 김영한 등의 면면만 보더라도 (적어도 그들 책과 번역서를 읽어본 입장에서 평하자면) 불교독해에는 함량 미달입니다.
왜 그렇느냐고요? 사실 그 정도 수준의 불교 이해에 대하여 갑론을박하고 근거를 댄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입니다. 일급의 불교독해와 더불어 씨름하기에도 세월이 모자랄 판에 불교독해에 문외한인 이들의 불교해석을 읽고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불교공부의 입장에선) 무익하고 해로운 일입니다. 그들(참고서적의 저자들)이 제기한 문제 자체가 불교의 근본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게 그들의 취향인만큼 그냥 그들대로 놀게 놔두면 될 것입니다.
박태웅님의 지속적인 발전 있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참고해 공부에 활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