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께서 입적하셨다. (사)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는 입적을 즈음한 스님의 유언을 이렇게 정리하여 우리들에게 알려주었다:
스님께서는 입적하시기 전날 밤에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또한 스님께서는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스님 저서에서 약속하신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그 동안 「무소유」, 「일기일회」등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하는 많은 저서를 남기셨으나, 그 동안 풀어 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 가지 않겠다고 하시며 스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평소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 (사)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 법정스님 입적
그리고 류시화 시인은 지난해 6월의 유언 내용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2009년 6월 스님께서 제자 두 명과 저를 포함해 가까운 사람 서너 명을 불러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결연한 의지였고, 특별히 스님께서 우리를 불러 공식적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따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결국 송광사에서 불교 예법에 따라 다비식을 치르기로 정해졌습니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그때 스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장례식과 다비식이 어디서 치러지든, 어느 장소에서 그의 육신이 불태워지든, 그것은 단지 무상함이 드러난 결과일 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고 스님도 그렇게 여기시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작년에 하셨던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저의 의무라 여겨져 여기에 밝히는 것뿐입니다.
— 류시화, 산이 산을 떠나다
서재에 있는 그 분의 첫 수상록 «영혼의 母音»을 꺼내들었다. 책날개에는 훤출하고 정결한 사십대 수행자의 옆얼굴 사진이 실려 있고, 그 아래에 “우리 시대의 모든 이웃들은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영혼의 母音»은 1972년에 초판이 간행되고, 1978년에 수정판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1971년 3월에 쓴 <미리 쓰는 유언>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무소유»에 중복되어 실려 있기도 하다.)
«영혼의 母音»에 실려 있는 사십대 시절의 법정스님
하여 우리가 공개적으로 접할 수 있는 법정스님의 유언은 모두 세 가지가 되는 바, 1971년 3월 유언, 2009년 6월 유언, 2010년 3월 유언이다. 시기상으로는 거의 40년의 격차가 있는 상이한 유언들이지만, 놀랍게도 이 유언들의 내용은 완벽히 서로 통한다. 1971년의 <미리 쓰는 유언>의 내용을 발췌해서 읽어보자: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善意志)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
— <미리 쓰는 유언>에서(이하 동일)
이 유언은 입적하기 전날 밤의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는 유언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40여년 전의 어느 잡지에 썼던 글 내용이 입적 전날 입으로 되풀이된 것이다. 도대체 참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길래 스님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와중에도 그것을 놓치지 않은 것일까? 마침 <미리 쓰는 유언>에서는 그 참회의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와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 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은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가락치밖에 내지 않았었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가 만약 넉살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반병신이었다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쫒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아마도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에도 그 “반병신 엿장수”를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생사를 넘어 참회할” 허물에 다름아닌 바로 그 허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 그럴 것이다. 그 분이 머리맡의 책들을 신문배달하는 사람에게 전해달라 유언을 남긴 것도 40년 전에 미리 쓴 내용과 다를 바 없으므로.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관념이니까.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동화책이 내 머리맡에 몇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요”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새삼 놀랍다.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썼던 유언, 40여년 전에 어느 잡지에 기고했던 글에 철저히 책임을 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벽주의적인 자세는 이어지는 유언 내용에서도 지속된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사람들보다 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간단 명료한 것을 즐기는 성미니까.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목련을 심어달라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은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기어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이 내용은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으로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류시화 시인이 밝힌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는 유언 내용은,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목련을 심어달라”는 가상의 유언을 역전시킨 것이다. 즉, 사문은 무덤이 없으므로 양귀비꽃이나 목련을 심을 수 없으므로, 그와 반대로 육신이 타고 남은 재로 오두막 철쭉의 거름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좋아하는 꽃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기쁨을 준 꽃을 향해 간 것이다.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라는 유언과 함께 일평생 “반병신 엿장수”와 “신문배달 소년” 등등의 작은 자들을 향하셨던 그 마음을 끝내 들키고 마신 그 분, 이제 어디로 날아서 가시는 것일까? 이제 어디로 다시 태어나시는 것일까?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군데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의자의 위치만 옮겨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 나라에게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가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내생에는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모국어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눈에 밟힌다. “말빚”이라는 낱말도 마음 한 켠에 깊이 들어온다. “말빚”은,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아름다운 말일지라도) 오히려 허물을 지게 되었다는 판단을 담고 있다. 작은 생명들에 대한 사랑을 아름다운 모국어로 빚어올린들 하나의 말빚에 불과한 것이니, 이제 그마저도 허물로 알고 생사를 넘어 참회하시는 것인가? 명경지수와도 같은 글들을 절판시키는 그 뜻 참으로 깊이 새길 만하다.
불교를 배우고 있는 나로서는 출가사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언제나 조심스럽다. 어린 나이에 반병신 엿장수를 기만했던 허물을 두고 생사를 넘어 참회하는 스님의 마음, 평생토록 작은 생명들을 향하였던 스님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자 이 글을 쓰지만 행여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곳, 길상사 행지실 설경.
그간 잘 계셨습니까?
한번씩 들러보는데,
오랜만에 올려 놓은 글을 읽으니
반가웠습니다.
길상사 행지실 눈꽃 만개한 사진을 보니 새로 울컥, 하는군요. 그리움의 ‘곳’ 하나를 내게 남기고 그분은 가셨는데… 마지막 말씀에서 왜 제 눈에는 허무가 밟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글을 썼네요. 점점 할 말이 없어져서 그런 듯합니다.
철학적·문학적 시선으로 보면 확실히 불교적 세계는 ‘허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듯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불교적 시선으로 보면 일반 철학적·문학적 세계는 뭔가가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게 덧칠된 느낌이 듭니다.
저는 배움을 통하여 결국 철학적·문학적 세계에서 불교적 세계로 이동했는데, 돌아보니 예전에는 동감했던 감수성과 사고가 이제는 (채식주의자에게 고기류가 그렇듯이) 거북살스럽고, 예전에는 동감하기도 힘들고 뭔가 고독하고 허무적으로 비쳤던 불교적 세계가 이제는 담백하고 맑고 한가롭습니다.
채소의 맛은 채식주의자가 제일 잘 알고, 고기의 맛은 고기를 즐겨먹는 자가 더 잘 알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르침과 사상도 그런 유비 관계가 성립한다고 생각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세간에 허무적으로 비치는 게 당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혀 허무와 상관이 없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가르침인 것 또한 사실일 것입니다.
결국 모든 언어는 옳고 그른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사실은 ‘허무’라고 해도 옳고 ‘생생하다’고 해도 옳으니까요),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자리를 드러내는 듯합니다. 그런데 세간의 모든 논조는 예외없이 그 사람의 자리를 논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언어만을 가지고 논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같습니다. 이게 제가 갈수록 말이 적어지는 연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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