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의 깊은 골짜기에서 달이 풀려나듯 — 산치의 탑들을 바라보며

엘로라·아잔타 등지의 오랑가바드에서 출발하여 산치 인근의 보팔역에 이르는 여정, 다시 보팔 역에서 출발하여 아그라에 이르는 여정은 광활한 데칸고원을 가로지르는 대역정으로, 직선거리로 약 80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 일정을 시작하여 오전 중에 순례를 마치고 오후에 기차에 탑승하는 일정이므로 저녁을 넘어 밤중까지 기차여행이 지속되는 고된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다들 순례의 감동과 흥분 탓에 피곤한 줄 모른다.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 이 세상을 유행하는 동안 신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토록 힘이 된다는 것 또한 불가사의한 일이다. 더구나 불교처럼 전 존재계와 함께 호흡하는 가르침을 따르자면 어느 순간도 어느 무엇도 소홀히 할 게 없다. 하물며 그 가르침이 피어난 땅에서랴.

산치는 아잔타·엘로라 석굴사원과 팔대 성지 중 첫 순례지인 상카시아의 중간께에 위치한다. 지형상으로는 데칸고원에 소속되어 있으나 비교적 덜한 고지대인데다 비옥한 토양을 끼고 있어 보팔에서 산치로 가는 길은 싱그러운 풍경을 선사한다. 유채꽃 만발한 들녘, 길가의 나무들, 나무 아래 집들, 집들 주위의 사람들, 느린 동물들이 차창 밖으로 바로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우리네 옛 시절 허름한 농촌풍경과 다를 바 없다. 눈앞에 훅 펼쳐지는 슬픔의 너울 너울들, 그렇지만 눈물짓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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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의 구릉에서 바라본 광활한 평원. 지평선은 끝이 없어 마침내 보이지 않는다.

산치의 구릉지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평온한 풍광이 아득하고 아득하다. 나는 어디에 와 있는가? 무너진 사원유적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광활한 평원 위에 서면 이 몸은 한 점 왜소한 몸뚱어리에 불과한 것을! 이 몸뚱어리에 어찌 그토록 많은 회한이 있는 것이며 어찌 그토록 많은 슬픔이 있는 것이며 어찌 그토록 큰 비원이 있는 것이냐? 그리고 한낱 이 몸뚱어리에 그토록 위대한 숨결이 깃들 수 있단 말이냐?

작고 봉긋한 구릉지대에 이 많은 탑들을 세운 뜻은 무엇이었을까? 산치의 구릉은 자그맣지만 원대한 시야를 제공한다. 시방의 모든 생명들과 평등하게 나란히 호흡하고 있다는 성스러운 감각을 선사한다. 대자대비라는 언어는, 앞으로의 순례일정에서도 무수히 마주치게 되겠지만, 바로 이와 같은 대평원의 언어가 아닐까? 대자대비라는 언어는 추상적인 어휘가 아니라 지극히 인도적인 어휘, 지극히 토속적인 어휘가 아닐까? 저 멀리 아득히 평원의 들녘을 걷는 어느 인도인은 왜 자꾸 무한한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일까?

무한한 길, 무한한 시선 위에 산치의 탑이 섰다. 마치 사람 몸 입은 자가 대지 위의 한 점 몸뚱어리로 서듯, 한 그루 나무로 서듯, 한 점 흐름으로 서듯.
 

현재 산치에는 대탑, 제2탑, 제3탑 등이 온전히 남아 있고 사원과 승원은 일부는 터만 남아 있거나 일부는 무너진 형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제2탑만 구릉 서편 아래에 동떨어져 있고 나머지 유적군은 대탑 주위로 두루 퍼져 있다. 산치는 불교미술의 보고이다. 우리나라 석탑의 기원을 설명할 때 언제나 이 산치의 탑이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불교미술에서 차지하는 산치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한 산치대탑 사방 탑문에 새겨진 조각들은 불교미술사에서 불상이 등장하기 이전의 원형들을 간직하고 있어 부처님 재세시의 영광을 후대에 기리기 시작하면서 무엇을 소중히 여겼던가를 살펴볼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산치 유적지의 중심에 위치한 대탑은 원래 아쇼카 왕이 건립한 것이지만 후대에 두 배 가까운 규모로 증축되고 탑문들이 세워졌으므로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원형은 현존하는 제2탑에 비교적 가깝다고 추정된다. 그러니까 탑의 본체인 복발만 있는 단계, 다음으로 울타리를 두르는 단계, 그 다음으로 조각을 새긴 사방 탑문이 세워지는 단계로 탑 형식이 차차 확장되었다고 본다. 제2탑은 복발과 울타리만 있는 형태로, 울타리 네 곳에는 卍자 형태의 입구가 있는 중간 단계의 형식이다. 대탑에 비하면 매우 단출하지만, 단순한 가운데 엄정한 기품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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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 제2탑. 탑의 초기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엄정한 기품이 있다.

제2탑은 연대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복발의 건립연대 역시 아쇼카 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쇼카, 그 위대한 이름이 마침내 이곳에서부터 구체적인 형상과 함께 등장하기 시작한다. 또한 제2탑의 사리함에서 히말라야 지방에서 전법활동을 펼쳤던 맛지마 장로와 캇사파고타 장로 등의 사리가 발굴되었는 바, 그들은 다름아닌 아쇼카 왕이 파견한 다르마 사절단, 전법사들이었다. 사실 이 산치 유적 모두가 아쇼카라는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적 인물로부터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성지순례 역시 아쇼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니, 순례의 길에서 아쇼카 왕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 그 기나긴 인도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힐 정도이니 순례자들은 아쇼카 왕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존경의 염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쇼카 왕의 생애를 고요한 마음으로 살펴보면 그 영광스런 생애가 역설적으로 가장 커다란 번뇌의 생애였음을 알 수 있다.

데바남프리야 프리야다르쉬 왕은 즉위 8년에 칼링가를 정복했다. 그때 15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10만 명이 살육되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렀다. 그러나 칼링가의 정복 후, 데바남프리야는 법(다르마)을 배우고 법을 사랑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법의 가르침에 헌신하게 되었다. 이제 데바남프리야는 칼링가의 정복에 대하여 깊이 후회한다. 데바남프리야는 정복되지 않은 나라가 정복될 때 살육·죽음·추방이 일어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한다.

그러나 데바남프리야가 더욱 괴로워하는 것은 이것이니, 바라문들, 고행자들, 여러 종교적 신도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은 윗사람과 부모와 연장자를 존경하는 이들이자 벗과 지인과 배우자와 친척과 노예와 시종에게 충직하고 공손히 대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상처를 입었으며 살해되었으며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했다는 것이다. 직접 해를 입지 않은 이들 역시 벗과 지인과 배우자와 친척이 해를 입은 것을 보고 고통을 받았다. 모든 이들이 그와 같은 불행을 겪었고, 데바남프리야는 이를 괴로워한다. […] 이제 데바남프리야는 법에 의한 정복이야말로 최선의 정복이라고 생각한다.

— <아쇼카 암벽칙령 13>에서

데바남쁘리야는 “천애희견왕”으로 한역되는 아쇼카 왕의 별칭이다. 아쇼카 왕은 즉위 8년에 인도 동부의 칼링가(현재 오릿사 지방)를 정복함으로써 마침내 인도 아대륙을 동서로 관통하는 영토를 확정한다. 그러나 그 정복의 결과 10만 명이 살육당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렀으며 15만 명이 고향을 잃고 떠돌게 되었으니, 참으로 잔인한 무력정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잔인한 정복을 자책하지 않는다면야 그와 같은 정복사가 번뇌가 될 일이 없겠으나, 아쇼카 왕은 법에 대한 사랑과 함께 이를 깊이 자책하였고, 그리하여 일생동안 번뇌를 씻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드러난 그의 번뇌와 그 극복과정은 <아육왕경>에서 전기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바, 거기에서 그려지고 있는 아쇼카 왕은 위대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도리어 거대한 번뇌 앞에 선 가련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앞선다. <아육왕경>에 따르면, 그가 불교에 귀의한 것은 그가 세운 감옥에서 죽음을 맞게 된 어느 비구가 사형일을 앞두고 불퇴전의 각오로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이룬 뒤 아쇼카 왕에게 법을 설한 인연 때문이었다. 마침내 생사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비구가 수십만 명을 생사의 공포로 몰아세운 왕 앞에 섰던 것이고, 그 공포와 죽음 앞에서 털끝 하나 흔들리지 않은 비구의 정진력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대왕을 깊이 흔들었을 것이다. 감옥과 죽음과 공포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수행자의 정진력은 새삼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돌아보게 한다.

삶과 죽음이 무엇이랴.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죽음 때문에 열반에 이르지 못할까 걱정했던 그 비구는, 내쉬고 들이쉬는 한 호흡간에 두려움이나 슬픔을 싣지 않았고, 한호흡 한호흡의 흐름에 오롯이 전체를 맡겨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가 된 것이다. 그는 “해탈이 바로 이 지옥에 있음”을 알았고, 그 앎에 의지하여 존재의 사슬을 끊고 삶과 죽음의 바다를 건넌다. 그는 자신의 비극을 온전히 극복한 것이다. 그리고 아쇼카 왕을 대면하여 부처님의 수기를 전한다:

대왕이여,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수기하시었습니다.

‘내가 열반에 든 지 백 년 뒤에 파타리불다성에 이름을 아수가라고 하는 한 왕이 나오리니, 그가 사분(四分)의 전륜왕이 되어 나의 사리(舍利)를 널리 공양하고 8만 4천의 탑을 일으킬 것이다.’

또 대왕이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왕은 또 감옥과 지옥 등을 세울 것이며 그 감옥 안에서 수없이 많은 살생을 저지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왕은 마땅히 그것을 없애고서 일체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 것이다.’

대왕께서는 이제 마땅히 세존의 뜻을 만족하게 하셔야 합니다.

— <아육왕경>(역경원 역, 이하 동일)에서

비극을 당한 이는 비극에 함몰되지 않고 도리어 비극이라는 감정과 생각을 해체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겠으나, 수많은 비극을 유발한 이, 가령 아쇼카 왕처럼 수십만 명의 비극을 유발한 이는 그 비극을 극복할 길이 없다. 그 비극을 당한 이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어떻게 없애줄 수 있을 것인가? 두려움과 공포와 비극을 일으킨 그 과오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칼링가의 정복 후, 데바남프리야는 법을 배우고 법을 사랑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법의 가르침에 헌신하게 되었다.” 법에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그의 번뇌, 그의 비극은 더욱 커진다. 이름하여 그의 비극은 팔만 사천의 번뇌가 되었고, 부처님의 팔만 사천의 법문으로 그 번뇌를 부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법문을 기리기 위해 팔만 사천의 탑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팔만 사천의 탑은 팔만 사천의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주는 무외(無畏)의 탑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극이 많은 만큼 탑도 많아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일곱 탑을 무너뜨리고 사리를 취하여 팔만 사천의 탑에 분산시켜 모신다. 산치의 탑들 역시 바로 그 팔만 사천의 탑에 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산치의 탑들은 영광과 화려함의 언어가 아니라 비극과 번뇌를 필사적으로 극복하려는 간절한 언어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뭇 생명들의 두려움과 공포와 비극을 없애주려는 무외의 탑으로 읽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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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의 무너진 사원유적에 남아 있는 불상. 아쇼카 왕의 무외의 탑을 생각했던 것일까? 불상은 토속적인 인도인의 얼굴을 닮은 마투라 양식으로 무외의 얼굴이다.

우리는 아쇼카 왕과 같은 번뇌에 사로잡힌 왕을 또 한 명 알고 있다. 다름아닌 아버지 빔비사라 왕과 어머니 위제희 왕비를 유폐시킨 아사세 왕. 장아함경의 <사문과경>은 그 아사세 왕의 내면적 고뇌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러 현인들을 찾아다니며, 변함없이 “사문이 되면 무슨 과보가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만을 집요하게 던졌다. 수행자가 되면 무슨 결실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어찌보면 수준이 높지 않은 질문이다. 그런데 그는 부처님을 뵙고서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으니, 그가 그토록 그 질문에 사로잡힌 까닭을 한 번 헤아려볼 일이다.

그는 부왕을 유폐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의 과오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고, 그 과오를 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는 번뇌에 빠져 있지 않았을까? 혹시 사문이 되면 그 과오를 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그 비극과 번뇌에서 벗어나는 해답을 찾으려고 다름아닌 “사문이 되면 무슨 과보가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필사적으로 던지지 않았을까? 추측컨대, 그 질문은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뼈저린 질문이었을 것이다.

아쇼카 왕은 또 한 명의 아사세 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아쇼카 왕이 부처님을 뵈었다면 과연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 그러나 그는 부처님의 반열반 이후 태어난 왕이었고, 부처님을 뵙고 질문을 던질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행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를 낱낱이 순례하기 시작한 것은?

저는 부처님께서 걸으시고 머무시고 앉으시고 누우셨던 모든 자리에 다 공양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모습을 만들어서 미래의 중생으로 하여금 불여래께서 걸으시고 머무시고 앉으시고 누우셨던 곳임을 알게 하겠습니다.

— <아육왕경>에서

그의 순례의 여정은 마치 아사세 왕이 두려움 속에 영축산 아래의 부처님 처소를 방문하는 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아쇼카 왕은 부처님을 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순례지마다 공양을 한다. 아울러 후대인들이 “여래께서 걸으시고 머무시고 앉으시고 누우셨던 곳”임을 알 수 있도록 탑을 세운다. 만일 그가 세운 탑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순례할 수 있는 불교성지들 중 몇 곳은 영구적으로 확인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불자들의 성지순례 자체가 아쇼카 왕의 공덕을 크게 입고 있는 셈이다. 그는 무외의 발걸음, 무외의 순례로 무외의 탑을 세웠으니, 이는 당대인 뿐만 아니라 후대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고뇌와 비극은 컸으며, 생사의 바다는 바닥이 없었고 물결의 소용돌이는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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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 왕이 보리수를 순례하는 장면. 산치대탑 동문 평방의 부조.

“나는 여래께서 걷고 머물고 앉고 누웠던 곳에 모두 다 공양을 닦아서 생사의 괴로움을 여의고자 하네. 또 여래께서 걷고 머물고 앉고 누웠던 모습을 만들어 미래의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을 뵙는 인연을 일으키게 하려네.”(<아육왕경>) — 생사의 심연 속에서 이와 같은 크나큰 비원을 세운 아쇼카 왕은 즉위 10년에 보드가야의 보리수 순례를 시작으로 생사의 괴로움을 여의고자 장구한 성지순례를 시작한다. 산치대탑 동문 맨 아래 평방에 아쇼카 왕의 보리수 순례 장면이 감동적으로 조각된 까닭도 보리수 순례가 성지순례의 시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시절 왕들은 유흥을 위한 여행을 떠나 사냥이나 다른 오락거리를 즐겼다. 데바남프리야 프리야다르쉬가 즉위 10년에 삼보리(Sambodhi) 순례를 한 뒤로 다르마 순례가 시작되었다.

— <아쇼카 암벽칙령 8>에서

“삼보리 순례”는 부처님께서 정등각을 이루신 장소인 보리수 순례를 뜻한다. 이 순례의 장면을 묘사한 산치대탑 탑문의 조각을 살펴보면, 오른편에서 아쇼카 왕이 코끼리에서 내려오고 있다. 그는 아직 보리수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조각이 완성되었다. 그의 표정에서는 환희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팔만 사천의 비극과 번뇌를 해결하지 못한 왕이 심중에 커다란 의문을 품고 두려움과 설레임 속에 코끼리에서 내려오고 있다. 그는 언제쯤 얼굴을 돌려 보리수를 올려다볼 것인가? 그는 코끼리에서 온전히 내려와 두 발로 예를 갖추어 서기까지는 보리수를 향해 얼굴을 돌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리수를 올려다보는 그를 볼 수 없다. 그는 마치 영원히 보리수를 보지 못할 운명인 것같다. 누군들 보리수를 제대로 올려다볼 수 있겠는가? 무수한 타인들에게 아픔과 고통과 두려움과 비극을 일으킨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장면의 아쇼카 왕을 넘어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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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 왕의 보리수 순례 장면 세부. 오른편에 코끼리가 무릎을 꿇고 있고 아쇼카 왕이 코끼리에서 내려오고 있다. 그는 아직 보리수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박칼리 비구가 떠오른다. 거룩하신 부처님을 항상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했던 비구. 수행을 하기보다는 부처님을 바라보는 것을 오히려 좋아했던 박칼리 비구에게 부처님은 “다르마를 보는 자가 진실로 여래를 보느니라”고 경책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부처님께서 박칼리 비구를 떼어놓고 다른 곳으로 안거처를 옮기자, 박칼리 비구는 비감에 사로잡혀 영축산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박칼리 비구를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앞에 모습을 나투시고 자비의 손을 내미시며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다. 그러나 보리수를 향하여 차마 얼굴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아쇼카 왕의 비감을 생각하면, “박칼리” 대신 “아쇼카”로 그 게송을 바꿔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너라, 아쇼카여.
두려움 없이 여래를 올려다볼지니라.
마치 늪에 빠진 코끼리를 건져 올리듯
여래는 너를 건져 올리리라.

오너라, 아쇼카여.
두려움 없이 여래를 올려다볼지니라.
마치 아수라의 깊은 골짜기에서 태양이 풀려나듯
여래는 너를 풀어주리라.

오너라, 아쇼카여.
두려움 없이 여래를 올려다볼지니라.
마치 아수라의 깊은 골짜기에서 달이 풀려나듯
여래는 너를 풀어주리라.

— «법구경» 381 게송의 인연담(거해스님 역)에서

산치의 무외의 탑들에 둘러싸여 “박칼리”를 대신하여 “아쇼카”의 이름을 불렀으니, 이제 여래를 뵈려는 모든 이들의 이름, 순례자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오너라, 이 세상의 무수한 생명들에게 비극과 슬픔을 안긴 너여. 오너라, 이 세상의 무수한 생명들로부터 비극과 슬픔을 당한 너여. 오너라, 이 세상의 무수한 생명들의 비극과 슬픔을 전달받은 너여. 두려움 없이 여래를 올려다 볼지니라. 마치 아수라의 깊은 골짜기에서 달이 풀려나듯, 여래는 너를 풀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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