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라와 아잔타의 석굴들은 부처님을 모신 사원과 수행자들이 거주하는 승원으로 나뉜다. 우리나라 절집으로 비유하자면, 전각과 요사채로 나뉘는 격이다. 사원은 예불공간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 대개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 까닭에 석굴사원은 뛰어난 건축적 공간의 면모를 갖고 있다. 특히 윗층의 채광창을 통하여 우주의 주랑같은 궁륭을 거쳐 석굴사원의 어둠 속에 빛이 들이치는 장면은 압권이다. 깨끗한 빛이 광채를 뿌리는 가운데 수많은 석주와 조각들을 비추는 동시에 그림자를 떨어뜨려 석굴의 내부조형을 완성하는데, 마치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푸드득 깨어나는 듯하다. 수없는 부처님들과 수없는 천신들이 서서히 드러나셨다가 서서히 어둠에 잠기시는 과정을 오래도록 지켜보지 못함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어느 찰나 빛이 들어선 순간, 어느 부처님께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 사이 석굴사원을 배관하는 것이니, 드러난 모습도 극히 일부요 마주친 것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만나는 것이 모든 만남의 운명이요 진실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없듯이, 오래 머문들 찰나의 만남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쉬워할 것 없다. 배관하는 순간에, 순례자가 진실된 면목를 드러내어 전체적으로 만나면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 순례자여, 너는 누구인가? 너는 찰나찰나 어디로 옮겨가는가?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던” 장사 스님의 봄날처럼, 순례자는 존재의 진면목을 알아 봄날을 완벽하게 누릴 줄 알아야 순례를 순례답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엘로라 제10굴의 채광창과 궁륭
석굴사원의 장엄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석굴승원의 승방이다. 한두 평 남짓한 승방은 최소한의 돌침상 하나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엘로라 제12굴과 아잔타 제4굴은 대표적인 석굴승원으로서 다수의 승방을 갖추고 있다. 초기에 건립된 승원은 규모가 작아 승방이 많지 않으나 후기에 건립된 승원일수록 승방의 수가 많아지고, 더 나아가 불상도 모시게 된다. 그러나 어찌하든 수행자가 머무는 승방의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돌침상과 그 돌침상 넓이만큼의 나머지 빈 공간, 그 뿐이다. 거기에다 승방은 드나드는 문만 있을 뿐 별도의 창이 없는 까닭에 밤낮을 불문하고 등불을 켜지 않는 이상 어둡다.
승방은 일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거처나 주거지라고 말하기는 힘들 정도이며 차라리 그냥 굴이라고 부를 만하다. 흡사 돌로 만든 감옥같다. 순례자들은 감동한다. 먼 이국에서부터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잔타와 엘로라의 석굴사원과 벽화를 흠모하며 이곳을 방문했는데, 예기치 않게 마주친 한두 평 남짓한 조그만 승방 앞에서 마음이 크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이렇듯 고원의 외딴 곳에 어두운 석굴을 파고 들어앉은 이들은 누구일까?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쩐지 석굴승방 안에서 아라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듯하다. 돌침상 하나, 발우 하나, 등불 하나, 작은 체구, 그러나 한없이 맑은 기운. 승방 안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향기를 토한다. 그 서늘한 향기가 순례자들을 휘돌아 흔들고, 마침내 경전과 역사 속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온다.
엘로라 제12굴의 승방 내부. 돌침상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다.
한 바탕 바람이 일고 지나간 이곳은 아라한의 세계. 유마거사가 침상 하나만 놓고 텅 비운 채로 머물렀던 방장(方丈)처럼 좁은 승방. 그러나 여기는 문수보살과 유마거사처럼 세기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며, 3만 2천의 사자좌가 들어설 수 있는 곳이며, 변재에 걸림이 없고 지혜에 막힘이 없는 자가 누울 수 있는 곳이다. 엘로라와 아잔타 석굴의 승방이 대규모 석굴사원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이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하고 바로 이 사방일장(四方一丈)에 불과한 승방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승방에는 침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나머지 공간은 텅 비어 있건만, 자꾸만 누군가가 침상에 호랑이처럼, 황소처럼, 사자처럼 가로누워 순례자를 맞고 있는 듯하다. 그는 순례자에게 말한다: “잘 오셨습니다. 오는 자 없이 왔고 보는 자 없이 보았습니다.”(유마경) 그렇다, 오는 자 없이 오고 맞는 자 없이 맞음으로써만 순례자는 순례지에서 희대의 만남, 즉 순례를 성취할 수 있다.
방장 안에서는 지혜의 세계가 가없이 펼쳐지고 방장 문밖에서는 순례자들이 헤아릴 길 없는 현자의 그늘 속에 깊이 침몰한다. 아, 순례의 여정은 깊어라, 퍼올려도 퍼올려도 새롭게 솟아나는 우물처럼 맑고 어둡고 깊어라.
어둠 속의 승원을 나서니 밖으로는 일망무제의 고원. 두타 제일의 가섭 장로가 산중의 핍팔리 굴 속에서 7일 동안 결가부좌한 채 삼매에 들어 있다가 왕사성으로 탁발을 하러 내려가는 장면이 저절로 그려진다. 가섭 장로가 탁발의 길을 나서자 5백 명 가량의 천인들이 공양을 올리고자 한다. 그러나 가섭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신들의 왕 인드라가 왕사성 거리의 베짜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여 기어코 가섭의 발우에 공양을 올린다. 인드라는 공덕을 쌓은 기쁨에 가섭에게 절을 하고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위없는 보시가 이루어졌다”고 읊는다. 진정한 수행자는 사람과 하늘이 모두 귀하게 여기는 법. 부처님께서는 인드라의 노래를 들으시고 말씀하신다:
다른 부양에 의지하지 않고 탁발로써 자신을 유지하여 항상 마음이 고요하고 게으르지 않은, 그와 같은 비구를 신들은 부러워한다.
— «자설경»(이미령 역)에서
어찌 부러워하지 않으리. 한 인간으로 태어나 성취해야 할 바를 성취했고 보아야 할 것을 보았고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는데, 어찌 그 위없는 경지를 부러워하지 않으리. 산중의 굴에서 나와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일상 마주칠 수 있는 발걸음이지만, 그 누가 수행자와 아라한의 발걸음을 흉내낼 수 있으랴. 그 걸음에는 인간사의 혼곤함과 괴로움을 걷어낸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향취가 묻어 있는데, 그것이 어찌 흉내만으로 가능하랴.
빔비사라 왕이 사문 고타마와 운명적으로 조우한 것도 바로 그 발걸음과 몸가짐 때문이었으니, 모름지기 구도의 길은 온몸으로 이루어지고 온몸으로 나타나는 바, 남의 눈을 속일래야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고타마가 왕사성으로 탁발하러 왔을 때 빔비사라 왕이 궁전 위에서 그를 발견하고 말한다:
너희들은 저 사람을 보아라. 아름답고 당당하고 청정하다.
발걸음은 단아하고 눈은 바로 앞만 보고 있다.눈을 아래로 뜨고 정신이 깨어 있나니, 태생이 천한 신분은 아닐 듯.
신하들은 쫓아가 알아보라, 저 비구는 어디로 가는가.— «숫타니파타» 410-411
신하들은 고타마의 뒤를 따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왕사성 주위를 둘러싼 다섯 산봉우리 중 하나인 판다바 산. 그 산으로 오르내리는 길에 왕사성과 마을을 아늑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신하들은 산 아래 마을을 정겨운 눈길로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산을 오르고 싶었겠으나, 전면만을 주시한 채 천천히 판다바 산을 오르는 수행자의 품위에 매료되어 하마 해찰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내 신하들은 산중 거처를 확인하고 돌아와 왕에게 보고한다:
대왕이시여, 그 비구는 판다바 산 기슭의 굴 속에
호랑이처럼, 황소처럼, 사자처럼 앉아 있나이다.— «숫타니파타» 416
운명이 회전하듯, 사문 고타마도 마하가섭도 유마거사도 엘로라·아잔타의 수행자들도 한결같이 사방일장의 굴 속에 들어앉았던 것이다. 호랑이처럼, 황소처럼, 사자처럼! 기백이 강렬하기 짝이 없는 그 굴은 동아시아의 불교 역사에서 “방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이며, 마침내 호시우행(虎視牛行)하는 방장의 지혜가 수많은 선객들을 제접하게 될 것이다. 순례자인 우리는 모두 이렇듯 방장의 제자들, 석굴의 후예들이다. 우리가 가진 언어에 이토록 깊은 역사와 체취가 배어 있다는 것 또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아잔타 제4굴의 승방들. 주랑을 따라 벽쪽으로 여러 승방이 배치되어 있다.
“호랑이처럼, 황소처럼, 사자처럼 앉아 있나이다.” — 판다바 산을 올랐던 한 신하는 범접할 수 없는 인물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안고 왕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이는 일상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길을 걸으며 결정코 욕망으로 점철된 생사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정진하는 수행자를 온몸으로 감지하고 난 뒤의 보고문이다. 수행자도 아름답고 신하도 아름답다.
나는 빔비사라 왕의 신하가 되어 다시 석굴승원의 승방을 들여다본다. 컴컴한 속의 돌침상 하나, 발우 하나, 그리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 낮고 느린 사자후가 순례자를 쓸어버리고 태고의 고원을 가로지른다.
나는 나에게 무엇을 보고할 것인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리라, 이미 타버린 재처럼 다시 번뇌에 불붙는 일이 없으리라, 잎이 떨어진 나목처럼 욕망으로 점철된 생을 벗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라.
이곳은 서천의 데칸고원, 이제까지 경험한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리고, 맑음이 되어 고요함이 되어 바람을 가르며 혼자서 가리라.
굴 안에서 의 시각으로 빛이 오는 굴의 문쪽으로 찍어보면
한결 lightening struck가 실감 날 듯 합니다.
부러울 것 없는 그 거지들….이 무한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