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 김용준이 성북동으로 이사를 한 것은 1934년이었다. 당시 성북동의 형편이 어떠하였으며, 그가 이곳으로 이사온 까닭에 대해서는 그의 글 <노시산방기>(1939년 무렵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령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그가 이사오고 나서 일이 년 뒤에 이태준이 그 감나무의 늙음을 기려 “노시사老柹舍”라 명명하였고, 근원은 이를 그대로 받아 자신의 성북동 집을 “노시산방老柹山房”이라 이름짓게 된다: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산방이라 한 것은 삼사 년 전에 이군이 지어 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칠팔십 년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이삼 주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이군이 일러 노시사라 명명해 준 것을 별로 삭여볼 여지도 없이 그대로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노시산방”이라는 이름이 탄생한 시기는 적어도 1936년 무렵, 상허와 근원의 나이가 서른 셋이었을 때이다. 아울러 <노시산방기>를 보면 근원이 “老”자를 퍽이나 좋아했음을 알 수 있는데, “노경”이니 “노련”이니 “노자”이니 “자하노인”이니 운운하며 “老”자를 찬탄한 그 글은 서른 여섯 무렵에 쓴 것이다. “뜰 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라는 그의 단언은 놀랍지 않으나, 삼십대 중반의 그가 “늙은” 감나무를 사랑하고 또 “老”자를 사랑했다는 점에서는 퍽 놀랍다.
아무튼 노시산방의 주인은 근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늙은 감나무였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산골 개울물이 마르고 샘물이 마르고 식수가 떨어지고 밤나무와 대추나무가 죽고 철쭉과 초목이 죽어나가던 때에도, 근원은 “노시산방의 진짜 주인공”인 감나무만큼은 살리기 위해 “매일같이 십 전짜리 물을 서너 지게씩 주기로 했다”고도 한다. 가히 근원이 늙은 감나무에 쏟은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그 집을 근원은 1944년에 수화 김환기에게 팔고 양주 고든골로 이사한다. 근원의 이사 이력은 열화당에서 잘 정리해 놓았다:
『근원수필』에 실려 있는 「육장후기」, 이번에 발굴 소개하는 「소루유아정」과 「반야초당 스케치」, 그리고 근원의 제자였던 서세옥 화백의 회고를 통해, 1944년부터 해방 이후까지 근원이 기거하던 곳들을 어렴풋하게나마 순서대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근원은 1944년경 성북동의 노시산방을 수화 김환기에게 넘겨주었고(「육장후기」), 이후 양주 고든골로 이사해 살았으며(「소루유아정」), 해방 이후 1946년 서울대 미술학부 동양화과 초대교수로 부임하면서 경운동 한옥집에 세들어 살았고(서세옥 화백의 증언), 서울대를 사직한 이후(1948년경) 다시 의정부로 이사해 ‘반야초당’이라 이름짓고 살게 된 것으로(「반야초당 스케치」) 추정된다.
노시산방을 판 뒤의 이야기는 <육장후기>에 기록되어 있다. “육장후기”는 곧 집을 판 뒤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좋은 친구 수화에게 노시산방을 맡긴 나는 그에게 화초들을 잘 가꾸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의정부에 새로 마련한 삼간두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한 채 있던 집마저 팔아먹고 이렇다는 직업도 없이 훨훨 날 것처럼 자유스로운 마음으로 천석고황이 되어서 자고 먹고 하다 보니 기껏해야 고인의 글이나 뒤적거리는 것이 나의 일과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근원은 감나무를 잊고 고인의 글이나 뒤적거렸던 것인데, 우연히 발견한 송씨의 시를 읽고 다시 감나무를 떠올리게 된다:
어쩔거나 근래 들어 뼈를 에는 가난으로
내 살던 집 이젠 벌써 이웃에게 넘어갔네.
다정하게 뜰에 선 버들에게 묻노니
앞으로 날 만나면 행인처럼 보려는가!
이 시인의 심경이 곧 근원의 심경이었음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는 이 시를 소개한 뒤 감상과 일화를 덧붙이고 있다:
그는 자기의 몸을 담고 살던 집을 무엇보다도 사랑한 듯, 버드나무를 보고 후일 이 집 앞을 지날 때면 너도 나를 남인 척하겠구나 하고 오열에 가까운 탄식을 한 흔적이 한 토막 절구를 통하여 역력히 드러난다.
집을 샀던 사람도 이 시를 보고서는 감격함을 못 이기어 그 집을 도로 송씨에게 주었을 뿐 아니라 송씨의 부채까지도 물어 주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 시에 숨어 있다.
근원의 <육장후기>는 바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기록, 자신의 현실에서 벌어진 이야기의 기록이다.
지금 회상하면 허망타 할까 어이없다 할까, 한참 북새통을 치른 다음 소위 ‘해방’이라는 시기가 오자 나는 다시 새로운 감격과 희망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온 뒤로 한번은 노시산방의 새 주인 수화를 만났더니 그의 말이 ‘노시산방을 사만 원에 팔라는 작자가 생기고 보니’ 나에게 대해 ‘대단히 미안한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후로 수화는 가끔 나에게 돈도 쓰라고 집어 주고 그가 사랑하는 좋은 골동품도 갖다 주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옛날 시인 송씨의 집을 산 사람을 연상하게 되고, 옛날 세상에만 그러한 사람이 있는 줄 알았더니 이 각박한 세상에도 역시 그와 같은 사람은 있구나 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오늘에도 가장 큰 보물을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함을 느낀다.
이상의 이야기는 근원의 <노시산방기>와 <육장후기>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근원수필을 읽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내용이다. 무척 감동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이다. 다만 이 사연을 여기까지 알 경우에만 그렇다.
<수화소노인가부좌상>(樹話少老人跏趺坐像), 1947년 4월에 근원 김용준이 수화 김환기를 그렸다. 그러니까 수화가 근원에게 가끔 돈도 쓰라고 집어 주고 좋은 골동품도 갖다 주던 시절이다. 근원은 서른 다섯 살의 수화를 가리켜 “어린 노인少老人”이라고 명명했다. 봄날의 한가로운 나한을 그린 듯한 이 그림 뒤에서는 감나무의 운명이 어른거리고 있었음을 어찌 알았으랴.
이 이야기는 좀더 극적인 반전이 있는데 실상은 이렇다. 수화가 근원에게 돈을 집어 준 것은 근원이 서울로 올라온 뒤, 그러니까 1946년 이후였다. 가끔 돈을 집어 주었다는 근원의 기록에서 우리는 수화가 한번이 아니라 적어도 두어 번은 그랬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좋은 골동품도 주었다지 않는가. 수화가 근원보다 아홉 살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웠다는 것은 아마도 오른 집값의 분배에 대한 그들의 철학이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동산 투기가 횡행하는 오늘날로 치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야기이겠지만.
아무튼 수화는 가끔 근원에게 돈을 쓰라고 집어 주고 좋은 골동품도 갖다 주었다. 사실 수화가 집을 팔지 않는 이상 오른 집값 때문에 수중에 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수화는 자기 돈을 들여서 지불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수화는 돈이 많은 부자였던 것일까?
마지막으로 앞마당 반이나마 고목이 된 감나무를 베었다. 아주 죽진 않았으니까 조금이라도 감이 열릴 텐데 하고 아이들이 섭섭해 하는 것을 나는 눈 딱 감고 서툰 톱질을 하고 도끼질을 해서 패놓으니, 한 이틀 땔나무로 풍족했다. 이것이 떨어질 때까지는 나무를 들여줄테지 믿었으나 역시 허사였다. 이제는 아무리 앞뒤 마당을 둘러보아도 패어 땔 만한 나뭇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노모가 안 계시고 어린 것들이 없다면 이토록 생활에 무능한 남편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그대로 냉방을 체험시켜 주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아이들은 둘째치고도 노래老來에 타향살이 고생 막심한 노모를 위로할 길이 없다.
— 김향안, «월하의 마음» 19면
수화의 아내 김향안의 1947년 12월의 기록, <계절>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우리는 근원이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겼으며, 수화는 김향안과 결혼하면서 그 집을 인수하여 “수향산방”이라고 이름지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집의 늙은 감나무를 근원이 끔찍히 사랑했음을 알고 있다. 심지어 그 감나무는 근원이 그려 준 <수향산방 전경> 그림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그 감나무를 김향안이 “눈 딱 감고” 패버린 것이다.
그 당시 살림살이에 가장 긴요한 것이 바로 쌀과 땔감이었으나, “이토록 생활에 무능한 남편” 수화는 그런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노모와 아내가 여름철부터 조금이라도 쌀 때 겨울땔감을 미리 구해두라고 달랬으나, 수화는 남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데 무슨 여름철에 땔감을 구하느냐며 멸시했다고 한다. 실상은 돈이 넉넉치 않아 그랬을 것이다. 김향안의 글을 좀더 읽어보자:
행여나 저녁에 돌아오는 남편의 입에서 오늘은 바깥 세상의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희망을 가져 보아도 그저 날이면 날마다, 아니 날이 갈수록 더욱더 전달되는 것은 혼탁해 가는 바깥 세상의 잡음뿐, 게다가 바깥 세상에 대한 남편의 모든 화풀이의 대상은 아내인 것이다. 그러면 남편은 끝끝내 그러한 세상과는 타협하지 않고도 앞으로 가족을 부양해 나갈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가족쯤 굶겨 죽이더라도 할 수 없다는 심산일까.
이토록 어려운 시절에, 내부살림은 이토록 힘든데, 수화는 근원에게 돈을 집어 주었던가 보다. 김향안은 수화가 쌀과 땔감을 집안에 풍족히 들이는 대신 근원에게 돈을 집어 주었다는 사실을 먼 훗날에라도 알았을까? 수화는 자신이 근원에게 집어 준 돈 때문에 노시산방의 감나무가 땔감으로 쓰였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을까? 근원더러 수화가 집어 준 돈과 노시산방의 늙은 감나무 중에 택일하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을 택할 것인가? 모두가 부질없는 질문이다.
오늘도 나무는 안 들어온다. 옥동같이 추운 날씨다. 곧 학교 간 아이들이 손을 호호 불고 돌아올 테지. 골방 가득히 찬 그림틀들을 부수면 한 주일 나무는 넉넉하리라. 나는 남편의 쇠를 꺼내어서 골방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아아 유화 냄새가 먼저 폐부를 찌른다. 몇몇 해를 두고 골방 신세만 지고 있는 그림들—무시로 쥐란 놈이 쫄까 보아, 장마가 지면 곰팡이 슬까 보아 계절마다 거풍하고 먼지 털고 갖은 나의 정성을 기울여 아끼고 간직해 온 나의 사랑하는 남편의 작품들—언제고 좋은 세상이 오면 이것들이 움직일 수 있는 남편의 좋은 앞날을 나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것들을 한 주일 나무로 바꾸려 한다.
오늘도 나무는 안 들어오고, 남은 땔감도 없고, 땔감을 살 돈도 없고, 패버릴 나무도 없고, 마침내 아내는 남편의 작품 틀을 부수려고 한다. 이러한 때에 근원의 소망은 얼마나 환영 같은가!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도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노시산방도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고, 늙은 감나무도 한 그루 환영에 불과한 것이었던가? 그 환영에 기대어 산방이 서고 만남이 이루어지고 돈과 물건이 오가고 그림이 그려졌으나, 결국에는 늙은 감나무는 그 모든 것을 만개시켰던 자신의 환영을 거두고 땔감이 되어 쓰러졌다. 이제 무엇이 남은 것일까? 옛 사람들의 만남인가,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인가, 아니면 그 예술가의 아내인가? 육장후기인가, 어린 노인 수화의 가부좌상인가, 아니면 아내의 겨울땔감 사연인가?
그 모든 것이 남았으나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감나무는 사라졌다. 감나무는 환영이었고, 사람들은 그 환영에 기대어 잠시 아름다웠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감동을 위하여 많은 사실들이 서로에게 비밀로 감춰져 있었을 뿐이다. 그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못내 마음 아픈 이유이다. 아픔을 달래기 위해 수화와 김향안이 늙은 감나무가 있는 집을 인수하던 순간의 산방풍경을 읽어본다:
근원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억자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200평 남짓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 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
— 김향안,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1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