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는 영원한 미망을 낳고 — 봄날, 공주에서

공기는 다사로우나 산야는 아직 잿빛을 벗어나지 못한 봄날, 공주로 향하다. 백제의 옛 도읍지 부여와 공주에 가면 물밀 듯 밀려오는 뭔가가 있어, 생활 속에서 마음 한 켠에 고이 담아두었던 것조차 밀어내고 씻어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 물결 지나가면 다른 한 물결 밀려오는 법, 공주의 봄날은 멀어지는 한 철 한 세월을 고맙게 고맙게 보내라고 한다.

목관 화문고리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목관(복원)의 화문고리

마곡사를 봄소풍하듯 방문하다. 동구에는 봄나물을 파는 할머니들, 달래와 씀바귀를 사다. 조미되지 않는 자연의 맛 그대로 인간의 몸에 넣을 수 있는 봄나물. 가장 간단한 절차를 거쳐 인간의 몸 안으로 양식이 되어 들어갈 수 있는 그 식물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동물 중에서 타자를 위해 가장 덜 생산적이며 자신을 위해 가장 많이 소비하는 동물 인간은, 입 안 전체를 매큼한 파맛으로 물들이며 터지는 은달래의 신비로운 형질을 다 알지 못한다. 입 안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식물의 형질이 인간을 살지게 하고 인간을 걷게 한다는 단순한 사실 앞에서, 인간은 한사코 모르는 척한다. 아니 그 사실을 철저하게 망각하며 살고 있다.

마곡사를 돌아본 뒤 공주 시내로 들어와 따로국밥을 먹는다. 식당 내부에는 사진작품들이 걸려 있어 식사후에 잠시 살펴보다. 식당 입구에 눈에 띄는 사진 하나, 공산성 사진이 눈에 든다. 때는 겨울날 잔설이 어려 있고 나무들은 나목으로 서 있는 순간이니, 산성의 선은 백제와전의 산수문양마냥 가슴에 뭔가를 치밀어오르게 하는 부드럽고 탄력적인 흐름을 목탄빛으로 애틋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애틋한 부드러움이, 오늘의 답사 내내, 겨우내 기다렸던 봄날처럼 나그네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감쌀 줄은 보는 순간은 미처 몰랐다.

봄날 한낮에 들른 송산리 고분군, 그 출토물에는 목관이 있어 고대적 인간의 죽음을 단정하게 장식하고 있다. 목관 전면에는 화문고리 두 점이 있으니, 부드럽고 탄력적인 원형의 무늬, 아득한 흑갈색 바탕에 연하고 외로운 황금빛 꽃.

목관은 정방형과 직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으나, 양옆에 세로로 점점이 박힌 돌기장식과 화문고리 만큼은 호올로 꽃잎처럼 연하고 고운 원형으로 덩그러이 떠 있다. 관 덮개는 단순명료하게 지붕을 이듯 하였으되, 돌기장식을 어슷 배치하여 자못 화려함을 구현하고 있다. 이토록 간단한 장식을 통하여 이다지도 기품을 구현할 수 있었던 백제의 장인은 과연 생애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목관의 배치공간을 목관에 정녕 안 어울리게도 흰 벽에 붉은빛 감도는 밤색 장으로 한 현대인은 과연 생애에서 무엇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송산리 고분군
송산리 고분군 봉분, 그 선형은 타자의 몸을 닮아 있다

송산리 고분 모형관을 나와 야외의 고분군 봉분을 바라보다. 봉분의 그 부드러운 선형線形을 보고 어찌 나그네만 고마워하고 또 마음 아파하리오. 아이들이 당장에 봉분으로 올라가 뛰어놀도록 유혹하는 그 선형은,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으나 끝내 타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몸을 닮았다. 설워 하시라, 그 존재는 봄날처럼 오가는 것, 봄날처럼 부풀어오르게 하였다가 봄날처럼 영원한 미망을 낳는 것. 그리고 고마워 하시라, 허망한 신화를 주어 생애를 윤택하게 하나니.

고분군에는 또 산동백 몇 그루 서 있어 봄날을 조촐하게 자축하고 있다. 어진 사람처럼, 조용한 사람처럼, 노란꽃의 산동백은 소슬히 고분군 한 켠에 서 있다. 화려하지도 않고 환하지도 않고, 그저 털털하게 노란꽃을 달고 있을 따름이다. 내내 말없이 곱게 살다가 간혹 아름다운 은유를 건네듯, 송산리 고분군의 산동백은 나그네에게 수줍게 말을 건네고 있다. 다른 아무런 꽃도 피지 않는 마당에 홀로 피어난 산동백은 그렇게 외로움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려나. 그렇게 하여 운명을 완성하는가.

 

봄날의 공주에서 대면한 선형과 소슬함에 취하여, 곰나루터에 얽힌 사연마저 모른 채 그곳을 들고나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산봉우리의 봉긋한 흐름을 목격하다. 곰나루터의 얕은 담장 위로 백제와전의 산수문양과 다름없는 봉긋봉긋한 산봉우리. 허공은 봄날의 기운을 흠뻑 머금은 것인가,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산봉우리가 사정없이 아련하다. 모두가 아련하고 따스한 봄날의 풍경에 깊이 홀린 듯, 누구의 얼굴에서나 미소도 피어나지만, 또 누구의 마음에서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얇은 설움도 촉촉히 스며나오리.

곰나루터 근처의 금강가로 가다. 이토록 안온한 강이 또 있을까. 주름 하나 없는, 결 하나 지지 않는 옥빛 비단의 흐름이다. 봄날의 잔잔한 미소가 되어 저 위로 애틋하게 몸을 누이고 싶지만, 아서라, 그 몸으로 금강의 수면에 흠을 내어서는 아니되리. 금강에서, 그 뭔가 아름다운 순간에 폐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다.

오늘은 산하의 봉긋한 조형과 소슬한 음조가 나그네에게 미망을 선사하였는가. 그 미망이 우금치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의 거대한 좌절마저 삼켜버렸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공주의 산하가 낳은 그 미망이 그 좌절을 보듬고 있는지도 모른다. 좌절을 이기는 길은 꼭 승리만은 아닐 터이므로, 더러는 패배의 짙은 음영을 봄날의 미망 속에서 얇은 설움으로 날려보내며, 더러는 예술작품에 영혼을 응집시키기 위하여 생을 단속하고 불태우며, 더러는 산동백같은 수줍은 은유를 어쩌다 누군가에게 건네며, 좌절을 이겨낼 수도 있으리.

이 산하의 언어를 숙지하고 보니, 우금치 전투를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는 없느니만 못하다. 나그네로서는, 공주의 들녘과 산하를 거닐면서 만난, 충격적으로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혼곤한 몸 속으로 시멘트 덩어리가 들어오는 기분이 들 정도이니, 그토록 배반적인 기념비가 또 있을까.

공산성 청매
공산성의 산문을 통과하자마자 방긋 선보인 청매

다행히도 공산성이 마지막 답사처이다. 마곡사에서 공주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버스 차창 밖으로 얼핏 보았던 공산성의 오르내리는 흐름은, 과연 저것이 산성인지 아니면 예술적 공간인지 종잡지 못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식당에 전시된 사진에서 보았던 겨울철 공산성은 헐거워진 산야에 등골처럼 옹골차되 그 흐름만큼은 정녕 물결처럼 골골마다 유유하게 곡절하고 있었다. 이미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므로, 공산성은 나그네의 존재를 그 입구에서부터 변화시켰다.

그런데 산문을 통과하자마자 만발한 매화. 그 향긋한 내음마저 바람 따라 흐른다. “공산성은 어찌 저런 것까지 . . .” 하는 탄성이 절로 터진다. 그저 분에 넘칠 따름이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것이 봄날이었는가. 하늘은 어찌 이런 봄날을 허락하는가. 누구에게나 허락되지는 않을 이 봄날을 홀로 만끽해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 막연한 설움의 원인이었는가. 나 홀로 찬란하더라도 하늘은 용서할 것인가.

공산성 석축
공산성의 산문 석축. 이곳에서 과연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공산성의 포근한 길과 산성의 유려한 선을 따라 거니는 동안, 그 공간은 살아오는 동안 내내 그리워했던 정신적 고향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봄날이다. 산문의 석축하며, 산성내 사찰 영은사 뜨락의 석축, 그리고 오전에 보았던 마곡사 대광보전 뒷편의 석축은, 동일한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우둘투둘한 네모꼴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돌을 쌓아올린 그 석축들은 군데군데 청회색 돌들이 섞여 있어 천연의 미감을 돋보이게 하거니와, 흐르는 선이 곡절할 때에는 느긋하고도 유려하게 휜다.

느리고 부드러운 호흡, 올망졸망한 부피와 무게, 산야의 선을 부수지 않는 흐름 — 공주를 답사하는 동안 내내 따라다녔던 또 하나의 조형언어이다. 둥근 원형의 산봉우리도 네모꼴의 돌들도 모양은 다르지만 어쩐지 나그네의 마음속에서는 똑같이 고이 포개진다.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아늑함과 편안함을 공주에서 느낀다. 마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노독을 푸는 것처럼, 이곳 공주에서 나그네는 뭔가에 홀린 듯 긴장이란 긴장은 모두 푼다. 과연 무엇을 보았는가. 이곳에 고요히 누워본다, 내 소망이 모두 이루어진 듯하므로. [2004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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