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경향상 에우리피데스와 관계가 있다는 점을 동시대의 고대는 놓치지 않았다; 이 예민한 감각을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제격의 표현은, 아테네에서 떠돌았던, ‘소크라테스는 에우리피데스가 시를 지을 때에 일삼아 도와준다’는 이야기이다.1 “좋았던 옛 시절”2의 추종자들은 현재의 민중 오도자들을 열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서 그 둘의 이름을 한꺼번에 거명하였다: 몸이며 정신이며 굳건했던 옛 마라톤의 늠름함이 의심스러운 계몽으로 말미암아 육체적, 정신적 힘이 지속적으로 위축되어 희생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오도자들의 영향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반은 분노요 반은 멸시인 이러한 음조로 그들을 이야기하기 일쑤이거니와, 이는 새로운 자들에 대한 충격에서 그렇다. 그들이 에우리피데스를 스스럼없이 포기하는 것이야 그렇다쳐도, 그들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서 소크라테스가 최상의 일급 소피스트, 모든 소피스트적인 운동의 거울이자 총화로 등장한다’는 점을 두고도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자들이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위안을 얻는 방법은, 아리스토파네스 자체를 시덥잖은 거짓말쟁이, 시詩의 알키비아데스로 보아 책형에 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는 않고 그러한 공격에 맞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심오한 본능을 방어하기보다는, 나는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밀접한 연계를 고대의 감수성으로부터 끌어내 입증해 보이겠다;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소크라테스가 비극 예술의 적수로서 비극 관람을 그만두었는가를, 또 어떤 의미에서 에우리피데스의 새 작품이 상연될 때에만 관객이 되었는가를. 자, 두 이름의 긴밀한 연관은 델포이 신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거니와, 그 신탁은 소크라테스가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고 하면서, 에우리피데스에게 지혜의 경연 2등상을 주었다.3
이 등급에서 3등으로는 소포클레스가 거명되었다; 아이스퀼로스와 겨뤄 영예를 얻을 정도였던 그는, 그러니까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에 정의를 행하고 있다고 한다. 명백히 이러한 앎의 명도明度야말로 저 세 사람을 공히 당대의 세 “지자知者”로 돋보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앎과 통찰에 대한 전대미문의 고평가를 옹호하는 날카롭기 짝이 없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하였다. 그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유일한 사람임을 깨닫았을 때였다; 반면에, 아테네에서 비평의 편력을 하면서 위대한 정치가들, 웅변가들, 시인들, 예술가들을 찾아가 방문할 때마다 어디서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을 만났던 것이다.4 그는 충격적으로 인식하기를, 그 유명인사들 모두가 그들 직업에 대해서조차 올바르고 확실한 통찰이 없으며, 오직 본능으로만 그 직업 일을 해나가고 있다고 보았다. “오직 본능으로만”, 이 표현과 함께 우리는 소크라테스적인 경향의 심장과 중심을 건드리는 셈이다. 이 표현을 가지고 소크라테스주의는 기존 예술은 물론 기존 윤리까지 유죄로 판결한다: 그는 검증의 시선을 던지는 지점에서 통찰의 결여와 망상의 기승을 보며, 이 결여를 빌미로 목전의 것이 내적으로 도착되어 있으며 비난받을 만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한 가지 점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현존을 교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일개인으로서, 경멸과 우월의 표정을 띠고서, 전적으로 다른 부류의 문화∙예술∙도덕의 선구자로서, 하나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세계의 모서리를 붙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제일 커다란 행운으로 꼽을 것이다.
이게 매번 소크라테스를 대할 때마다 우리를 사로잡는 엄청난 의혹이다. 이 의혹은 고대의 가장 의문스러운 이 현상의 의미와 의도를 인식하라고 거듭하여 우리를 유혹한다. 호메로스, 핀다로스, 아이스퀼로스로서, 페이디아스로서, 페리클레스로서, 퓌티아와 디오뉘소스로서, 가장 깊은 심연이자 가장 높은 고지로서, 명백히 우리가 놀라워하며 흠모하는 그리스적 본질을 일개인으로서 감히 부정해도 될 만했던 자는 누구인가? 이 마법의 음료를 무모하게도 땅바닥에 쏟아버리는 힘은 무슨 마성적인 힘인가? 인류의 더없이 고귀한 자들로 구성된 허깨비 가무단이, "오호라! 오호라! 네가 그 세계를, 그 아름다운 세계를 강력한 주먹으로 파괴하는구나; 그 세계가 쓰러지도다, 그 세계가 파멸하도다!"5 하고 반신半神에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데, 그 반신은 무슨 반신인가?
소크라테스의 본질을 여는 열쇠를 우리에게 내미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신귀”6로 지칭된 경이로운 현상이다. 자신의 엄청난 지성이 흔들렸던 특별한 상태에서, 그는 그 순간에 나타난 신적인 음성을 통하여 탄탄한 발판을 확보하였다. 이 음성은 다가올 때마다 언제나 뭔가를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본능적인 지혜는 전적으로 비정상적인 본성에서만 나타나, 여기저기에서 의식적인 인식을 가로막고 선다. 모든 생산적인 인간들에게서는 본능은 다름아닌 창조적-긍정적 힘이며 의식은 비판적이며 만류하는 것으로서 행세하는 반면에, 소크라테스에게서 본능은 비판자가 되며 의식은 창조자가 된다—결핍을 통하여per defectum [탄생한] 진짜 괴물스러움!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신비적인 장치가 괴물처럼 결핍되었음defectus을 인지하므로, 소크라테스를 두고, 신비가에게서 저 본능적인 지혜가 과도하게 발육되듯 논리적 본성이 중복임신을 통해 과도하게 발육된 특이질의 비-신비가라고 칭할 만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제 자신을 향하여 방향을 돌리는 일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나타난 저 논리적 충동에서는 완벽하게 거절되었다; 이 고삐 풀린 흐름을 타고 그는 본성의 폭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경악하는 가운데 최대의 본능적인 힘을 발휘하는 그 폭력과 부딪히고 있다. 플라톤의 저술에서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향이 가진 저 신적인 소박함과 확실성을 한 줄기만이라도 감지하는 자라면, 또한 소크라테스 배후의 논리적 소크라테스주의라고 할 만한 것의 무시무시한 충동이 그 바퀴를 어떻게 굴리고 있는가를, 그리고 이것이 그림자를 투과하듯 소크라테스를 투과하여 어떻게 목격될 수밖에 없는가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스스로가 이 관계를 예감했다는 점은, 그가 재판관 앞에서든 어디에서든 품위있게 진중함을 유지하여 자신의 신적인 소명을 타당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 점을 두고 그를 반박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거니와, 본능을 해체시키는 그의 영향을 인정하기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그가 언젠가 그리스 국가의 민회 앞에 소환되었을 때에, 풀릴 길 없는 그 갈등의 순간에, 유일한 판결 형식은 추방이었다; 그를 철두철미 뭔가 수수께기 같은 것,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것, 밝혀낼 수 없는 것으로 보고서 국경 밖으로 추방하기라도 했다면, 후세는 아테네인들을 두고 수치스런 일을 저질렀다고 비난할 권리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에게 단지 추방이 아니라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것은 소크라테스 스스로 보기에도, 죽음 앞에서 아주 또릿한 채, 죽음에 대한 자연스런 소름도 느끼지 않은 채, 집행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는 죽음 속으로 걸어간다, 플라톤의 묘사를 따르자면 주객酒客 가운데 최후까지 남아 새로운 날을 시작하기 위하여 새벽의 어스름을 맞으며 향연을 떠날 때처럼 평온하게7; 그러는 동안 그의 뒤에는 잠에 취한 동료들이 걸상이나 바닥에 엎드려 진리를 사랑하는 자 소크라테스를 꿈 속에서 보고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그리스 귀족 청년의 새로운 이상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전형적인 헬라스의 제자 플라톤은, 열광하는 자신의 영혼을 열렬히 다 바쳐서 그 모범상 앞에 엎드렸다.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 철학자들의 삶과 가르침» 2권 5장 참조. [↩]
- 아리스토파네스, <구름> 961행 이하, 1353행 이하 [↩]
- 델포이 신탁의 내용은 이렇다: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더 현명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하다.[↩]
- 플라톤, <변명> 20d 이하 참조 [↩]
- 괴테, «파우스트» 2부 1607행 이하 [↩]
- 플라톤, <에우튀프론> 3b5, <변명> 31c8, 40a 참조. 일반적으로 쓰이는 희랍어 daimon 대신 축소형어미가 부가된 daimonion이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좀더 문헌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나, 일단 daimon과 동일하게 신귀神鬼로 옮겨둔다. [↩]
- 플라톤, <향연> 223b 이하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