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 다른 관객의 실명을 거론하기에 앞서, 여기에서 잠깐만, 아이스퀼로스 비극의 본질 자체가 선사하는, 앞에서 서술한, 갈등을 일으키고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저 인상을 기억에 되살려보자. 우리의 습성이나 전승의 장단에 한결같이 맞지 않았던 비극의 가무단과 비극적 영웅들에 대해 느꼈던 우리 자신의 생소함을 생각해 보자—우리가 저 이중성 자체를 그리스 비극의 근원이자 본질로서, 그리고 서로 얽혀진 두 예술 충동,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뉘소스적인 것의 표현으로서 재발견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던 그 생소함을 생각해 보자].
저 근원적이고 전능한 디오뉘소스적 요소를 비극으로부터 솎아내는 것, 그리고 비극을 아예 새롭게 비디오뉘소스적 예술∙인륜∙세계관 위에다 세우는 것—이것이 밝은 조명 아래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에우리피데스의 경향이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에우리피데스는 이러한 경향의 가치와 의의에 관한 물음을 신화를 빌어서 동료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선사하며 던졌다. 과연 디오뉘소스적인 것이 있었겠는가? 그것을 폭력을 써서라도 헬라스 토양에서 근절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가능하기만 하다면야 그래야 한다고 그 시인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나 디오뉘소스 신은 너무나 강하다: 가장 지성적인 적대자—가령 “박코스의 시녀들”에서의 펜테우스—는 예기치 않게 디오뉘소스에게 현혹당하고, 이 현혹과 함께 자신의 숙명을 향해 치닫는다. 두 노인 카드모스와 테이레시아스의 판단은 노년에 이른 시인의 판단이기도 한 듯하다: 가장 현명한 개인들의 숙고는 저 옛 민속전통들, 영원히 자가증식하는 디오뉘소스 숭배를 뒤집지 못하는가 보다, 아니, 그 기적적인 힘들을 상대할 때에 최소한 외교관처럼 조심스러운 동감을 표하는 것이 온당한가 보구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 신은 그처럼 미온적인 동조에 분노를 품고 그 외교관을—여기 카드모스처럼—결국 한 마리 괴물로 변신시킬 수도 있나 보다. 이상의 것들을, 기나긴 생애에 걸쳐 영웅적인 힘을 발휘하여 디오뉘소스에게 저항하였던 그 시인이 우리에게 말해준다—그리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든 혼미로운 현기증을 애오라지 벗어나려고 탑에서 뛰어내리는 현기증 환자와도 같이, 그는 마침내 삶의 막바지에 자신의 적수를 영예롭게 만들고서 자살로 이력을 마감하였다. 이 비극은 그의 경향의 실행 가능성을 저지하려는 하나의 항의이다; 오호라, 그의 경향은 이미 실행이 되고 말았거늘! 기적은 일어난 뒤였다: 그 시인이 철회하였을 때는 이미 그의 경향이 승리를 구가한 뒤였다. 디오뉘소스는 이미 비극 무대에서 일소되고 말았다, 그것도 에우리피데스 입으로 발설된 마성적인 위세를 통해서. 에우리피데스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가면에 불과했다: 그의 입으로 발설된 신성은 디오뉘소스도 아폴론도 아니며, 전적으로 새로 태어난 신귀神鬼, 이른바 소크라테스였다. 디오뉘소스적인 것과 소크라테스적인 것: 이것은 새로운 대립이며, 그리스 비극의 예술작품은 이로 말미암아 몰락하였다. 이제서야 에우리피데스는 자진 철회함으로써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더없이 찬란한 신전이 폐허 속에 누워 있다; 그것이 모든 신전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는 파괴자의 비탄과 고백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에우리피데스가 모든 시대의 예술 판관들의 처벌을 받아 한 마리 괴물로 변신된다한들, 그 누가 그런 빈약한 벌충에 만족하리오?
이제 에우리피데스가 아이스퀼로스 비극과 싸울 때 함께 싸워 승리를 거두었던 소크라테스적 경향을 살펴보자.
드라마를 오직 비디오뉘소스적인 것 위에다만 세우려는 에우리피데스의 의도는,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그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지고의 이상으로 도대체 무슨 목표를 가진 것인가? 음악의 모태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디오뉘소스적인 것의 저 신비로운 어스름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한다면, 무슨 드라마 형식이 남아 있는가? 극화된 서사시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그 아폴론적인 예술 영역들에서 이제 비극적 효과가 성취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 지점에서, 서술한 사건들의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내 주장하고 싶거니와, 괴테는 그 자신이 구상한 “나우시카아”에서—제5막을 채울—저 전원적인 본질의 자살을 비극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겠는가1; 서사적-아폴론적인 것은 ‘가상’을 향한, 그리고 ‘가상을 통한 구원’을 향한 저 욕망을 품고서,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우리 눈앞에서 현혹할 정도이니 서사적-아폴론적인 것의 폭력은 그만큼 비상하다. 드라마적 서사시의 시인은 서사적 낭송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상들과 완벽하게 융합될 수가 없다: 그는 언제나 고요히 머물면서 [뭔가에 의하여] 추동되지 않는, 저 멀리 바라보는 눈길의 직관, 곧 제 앞의 영상들을 바라보는 직관이다. 극화된 서사시 속에서 그 배우는 가장 깊은 근저에서도 언제나 낭송가인으로 남는다; 내밀한 꿈의 봉헌은 자신의 모든 연기에 달려 있으므로, 그는 결코 전적인 배우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면, 아폴론적인 드라마의 이 이상에 대해서 에우리피데스 작품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옛 시절의 장엄한 낭송가인에 대해 후세의 낭송가인이 갖는 관계와 같은데, 후세의 낭송가인은 플라톤의 “이온”에서 자신의 본질을 이렇게 묘사한다: “뭔가 슬픈 일을 말할 때면,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지요; 그러나 내가 말하는 그 뭔가가 공포스럽고 실색失色할 만한 것이라면, 무서운 나머지 내 머리카락은 쭈뼛해지고, 내 심장이 두근두근하구.”2 이 말에서 우리는 서사적으로 가상에 빠지는 것을 엿볼 수도 없고, 진정한 배우, 곧 자신의 최고의 연기 속에서야 전적인 가상이 되고 가상에의 욕망이 되는 배우의 열렬함 없는 냉정을 엿볼 수도 없다. 에우리피데스는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머리카락이 쭈뼛해진 배우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적인 사상가로서 계획을 설계하며, 정열적인 배우로서 그 계획을 실행한다. 순수한 예술가는 설계에 있지도 않으며 실행에 있지도 않다. 이처럼 에우리피데스의 드라마는 냉정하면서도 불같은 것이며, 응고시킬 수도 있으며 태워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로서는 서사시의 아폴론적인 효과를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가능한 한 디오뉘소스적인 요소들에서 벗어나, 이제 어떻게든 효과를 도출하기 위하여, 유일무이한 두 예술 충동, 즉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뉘소스적인 것 내부에 더 이상 머물 수없는 새로운 성취 수단을 사용한다. 이 성취수단은, —아폴론적인 직관들을 대신하는—냉정한 역설적 사고와, —디오뉘소스적인 홀림을 대신하는—불같은 열렬함이다, 그러니까 최고로 실재적으로 모조된, 예술의 창공에 전혀 잠겨보지 못한 사고와 열렬함이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가 드라마를 오로지 아폴론적인 것 위에만 세우는 데는 전혀 성공하지 못하여, 정작 그의 비디오뉘소스적인 경향마저 길을 잃고 자연주의적이고 비예술가적인 경향에 빠져들고 말았다는 점을 잘 인식한다면, 이제 우리는 미적 소크라테스주의의 본질에 이미 가까이 다가선 셈이다. 대충 말해서, 그것의 최상위법은 이렇다: “모든 것은 아름다우려면 지성적이어야만 한다”; 이는 “지자만이 유덕하다”는 소크라테스 명제와 평행하는 명제이다. 이 규범을 손에 쥐고서 에우리피데스는 하나하나 모든 것을 재되, 다음과 같은 원칙에 맞추어 그것들의 원호를 잰다: 언어, 성격, 드라마상의 구성, 가무단 음악. 우리가 소포클레스 비극과 비교하여 그토록 빈번하게 에우리피데스의 시적인 결핍과 퇴보로 일삼아 꼽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 강렬한 비평 과정의 산물, 저 무모한 지성의 산물이다. 에우리피데스의 프롤로고스는 저 합리적인 방법의 생산성을 보여주는 사례임을 보여준다. 에우리피데스 드라마의 프롤로고스보다 우리의 무대기법에 거슬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작품 서두에 어느 한 인물이 등장하여, 자신은 누구인가, 플롯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아니, 작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용납하지 못할 만큼 짖궂은, 긴장 효과의 포기를 뜻하리라. 그러니,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전부 알게 된다; 누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겠는가? —그렇다, 여기에서 예언하는 꿈과 뒤에 등장하는 현실 간의 인상적인 관계가 벌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전적으로 달리 심사숙고했다. 비극의 효과는 결코 서사적 긴장에서 유래하지도 않으며, 이제나 저제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흥분된 무지에서 유래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위대한 수사적-서정적 장면, 곧 주요 영웅들의 정열과 변증법이 불어나서 방대하고 강력한 물줄기를 이루는 장면에서 유래한다. 모든 것은 플롯이 아니라 격정Pathos를 준비했던 것이다: 격정을 예비하지 않는 것들은 비난거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러한 장면에 흠뻑 몰입되는 것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청중에게는 없는 하나의 신체부위Glied, 전사前史의 직물에 뚫린 하나의 구멍이다; 청중이 ‘이런저런 인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제사항에 비춰볼 때 이런저런 경향들과 의도들의 충돌은 어떤 잇점이 있는가’ 하는 점을 계산까지 해야 하는 한, 주요 인물들이 벌이는 일이나 겪는 일에 관객이 완전히 침잠하기란 불가능하며 숨을 죽이는 고통과 공포를 공유하기도 불가능하다.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 비극은, 첫 장면에서 이해에 필요한 저 모든 실마리들을 어느정도 우연적으로 관객의 손아귀에 쥐어주기 위하여, 재기 넘치는 예술 수단들을 사용하였다: 필수적인 형식 같은 것을 은폐하고 우연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고귀한 예술가다움이 간직되어 있는 한 가지 특징.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관객은 저 첫 장면이 진행되는 동안 선행 이야기의 계산 문제를 풀어내느라 특유의 불안을 겪는다는 점, 그래서 시인의 아름다운 면들과 발단 단계의 격정을 관객이 놓치고 만다는 점을 [자신이] 간파하였다고 줄곧 믿었다. 따라서 그는 프롤로고스까지 발단 이전에 위치시키고서 그것을 사람들이 신뢰를 보낼 만한 한 인물의 입에 맡겼다: 한 명의 신이 빈번하게 비극의 경과를 관중에게 어느정도 보증해 주고 신화의 실재에 대한 갖은 의심을 제거한다: 데까르뜨가 경험 세계의 실재를 오직 신의 진정성과 신의 거짓 불가능성에 호소함으로써 입증할 수 있었던 방식과 유사하게.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영웅의 미래를 관중에게 보장해 주기 위하여 이같은 신적인 진정성을 드라마의 결말에서 다시 한번 사용한다; 이것이 악명 높은 기계장치 신deus ex machina의 임무이다. 드라마적-서정적 현재, 본연의 “드라마”는, 서사적 응시Vorschau와 외면Hinausschau 사이에 놓인다.
이처럼 에우리피데우스는 무엇보다도 시인으로서 자신의 의식적인 인식을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그리스 예술사에서 그토록 사유할 만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자신의 비평적-생산적 창작을 감안하자면, 그로서는, 마치 자신이 아낙사고라스 글의 처음을 드라마를 위해 되살리기라도 하듯 빈번하게 기분이 우쭐해졌음이 분명하다. 그 [아낙스고라스] 글의 첫 구절은 이렇다: “시초에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 지성이 나왔고 질서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완전히 취한 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말짱한 자가 등장하듯 철학자들 중에서 아낙사고라스가 “누스”3를 가지고 등장하였으니, 에우리피데스 역시 자신과 다른 비극 시인들과의 관계를 [이와] 유사한 영상으로 파악하고 싶었다. 만유의 유일무이한 질서자이자 주관자인 누스가 예술가적인 창작에서 배제되어 있는 한, 모든 것은 여전히 근원적인 혼돈의 뒤범벅이었다; 이렇게 에우리피데스는 판단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렇게 그는 “처음으로 말짱한 자”가 되어 “취한” 시인들을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 소포클레스가 아이스퀼로스를 두고 무의식이긴 하여도 정의를 행사한다고 한 말은, 확실히 에우리피데스의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퀼로스가 무의식적으로 창작했기 때문에 부정의를 창작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아니겠는가. 신적인 플라톤 역시 시인의 창조자적 능력을 두고 의식적인 통찰이 아니라 대부분 반어적인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그 능력을 예언자와 해몽가의 소질과 동급에 놓았다; 아니, 시인은 무의식이 될 때에, 그리고 더 이상 정신이 없을 때에 비로소 유례없는 능력으로 시를 짓는다고 한다.4 에우리피데스 역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비지성적인” 시인의 대립을 보여주려고 하였으며, 그의 미학적 근본 명제 “모든 것은 아름다우려면 의식적이어야 한다”는, 이미 말했던 바이지만, 소크라테스의 “모든 것은 선하려면 의식적이어야 한다”와 평행 명제이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는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의 시인으로 여겨진다. 아니, 소크라테스는 옛 비극을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그래서 무시했던 저 두 번째 관객이었다; 그와 연합하여 에우리피데스는 과감하게 새로운 예술 창작의 영웅이 되고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옛 비극이 파괴되었으니,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는 그리하여 살인자의 원리가 된다: 그러나, 옛 예술의 디오뉘소스적인 것에 대한 투쟁을 지향하는 한,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디오뉘소스의 적수, 곧 디오뉘소스에 대항하는 새로운 오르페우스, 아테네 법정의 마이나데스에 의하여 찢기도록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력한 신까지도 강제로 추방하는 새로운 오르페우스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디오뉘소스는 에노나이인들의 왕 뤼코르고스로부터 도피할 당시처럼 바다의 심연 속으로, 그러니까 온 세계를 점차적으로 휘덮는 비의의 신비로운 풍랑 속으로 들어가 모면하였던 것이다.
- 나우시카아와 오뒷세우스의 만남은 «오뒷세이아» 6권에 그려져 있다. 해변에서 빨래하고 씻고 놀던 나우시카아는, 배가 난파되어 가까스로 해변에 당도한 오뒷세우스를 발견한다.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오뒷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귀환한다. 괴테는 이 주제로 비극을 쓰겠다는 계획을 언급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몇 행의 운문만 남겼다. [↩]
- 플라톤, <이온> 535c5 이하 [↩]
- 희랍어를 음역한 “누스”Nous는 “지성”, 혹은 “정신”으로 옮길 수 있다. [↩]
- 이와 관련한 내용은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온> 533e-534d, <파이드로스> 244a-245a, <변명> 22b 이하 참조. [↩]